해, 천재로 태어난 아이 (1)
하루 종일 들녘에서 느긋하게 반추하던 누렁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산골의 저녁이 시작됐다. 개구쟁이처럼 뛰어놀던 아이들은 누렁이를 몰며, 어둠이 그물처럼 마을을 덮치기 전에 백열전구 빛이 새어 나오는 각자의 둥지로 돌아갔다.
한 아이가 어둑해지는 밤공기를 가르며 깊은 골짜기로 걸어 들어갔다. 그 골짜기는 우리 집 마루에서 보면 마치 긴 파마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의 뒷모습처럼 보였다. 아이는 골짜기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나오거나, 긴 막대기를 들고 칼싸움 놀이를 하며 걸어 나오곤 했다. 아이의 이름은 '해'였다. 해는 이장님 댁 막내아들이었고, 나와는 한 시간 차이로 먼저 태어났다.
해의 태몽은 '장엄한 일출’이었다. 이장님이 저수지 아래 논을 갈무리하러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는데, 황금빛 태양이 서서히 저수지를 발판 삼아 떠오르더란다. 평온한 늦가을의 색을 닮은 조용하면서도 장엄한 일출이었다고 한다. 해의 태몽 이야기는 술기운 오른 이장님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내가 마흔 가까이 살면서 그렇게 희한한 태양은 처음 봤다니까. 아, 글쎄 거대한 태양이 물안개를 순식간에 걷어들이고 내 앞을 환히 비추는데,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무릎을 꿇고 올려다봤지."
"아니, 네 살짜리 요것이, 지 아버지가 계산기로 두드려야 나오는 숫자를 눈알 한 번 굴리더니 척 알아맞히는 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저기 아무개 집에 갈 축의금 봉투도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딱 써놨지 뭐여. 가둥질 할 때부터 싹수가 남다르더니만, 보통 비상한 놈이 아니라니까. 애가 태어난 게 아니라, 천재가 태어난 거라고."
이장님은 한참 아들 자랑을 늘어놓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아버지를 보며 딱하다는 듯 헛헛하게 웃었다.
“자네, 아무 걱정 말어. 뭐 이런 자식도 있고 저런 자식도 있는 법이지. 고작 한 시간 차이로 태어났어도 그릇이 다르게 태어나는 거니까. 그런데 저놈, 올해는 학교 꼬박 나가나? 병원은 이제 안 가도 되는겨? 그래, 뼈가 왜 그렇게 약하게 태어났누? 자네 부부 모두 건강한데 말여. 우리 해처럼 머리라도 비상하게 태어났으면 학교 못 가도 혼자서 공부할 텐데. 그래도 걱정 말게. 자네가 오래 기다리다 본 무남독녀인데, 옥이야 금이야 하면서 조신하게 잘 키우면, 내가 며느리로 삼을 테니.'
"아이고, 이장님. 뭔 소리래유. 우리 경아는 시집 안 보낼 거유. 저렇게 이쁜 걸 누구한테 보낸대유. 아무리 해가 천재라 해도 안 줄라유. 이장님 땅을 다 준다고 해도 안줄거구만유. 희귀병이라도 커가면서 나아진다고 하니까 걱정할 거 뭐 있나유."
두 사람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장님은 해의 천재성을,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두고 티격태격했다.
해는 태어날 때도 나와는 반대로 아주 조용히 태어났다. 단 한 번 짧은 울음을 터뜨렸을 뿐, 대문이 떠나가도록 요란스럽게 울어 댄 나와는 다르게 의젓했다. 이장님의 자랑은 사 남매가 모두 가는 곳마다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 것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막내 해의 영특함은 어디에 내놔도 꿀릴 게 없다고 했다. 언젠가 해가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서 최고상을 타오자, 이장님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동네잔치까지 열었다.
5 학년 1반, 해는 끝줄에서 두 번째에 반장 종수와 함께 앉았고 맨 뒤에 내 자리가 있었다. 넌 왜 매일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거냐,라고 해가 종이비행기를 접어 휭, 날려 보냈다. 멀지도 않은 거리, 그냥 고개만 돌려 팔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에게 바보야, 하고 핀잔을 주었다.
몽상가 같아. 그렇게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네가.
모른척하려다 종이비행기를 펴보니 그 안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넌 매일 왜 미친년 치맛자락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데, 꼴도 안 먹이면서,라고 쓰려다 그만두었다. 종이비행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날아왔다. 해와 종수는 번갈아 가며 무언가를 계속 날렸지만 날아오는 종이비행기의 절반은 내 책상에서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책상으로 떨어진 종이비행기엔 시답잖은 물음이 적혀 있었다.
야, 너 어제 산소에서 잘 자더라. 귀신이 자장가 불러줬어?
일요일 오후, 냉이와 쑥을 캐러 갔었다. 엄마는 내가 어디로 가려하면 늘 말리긴 했지만 나물 뜯으러 간다고 하면 그냥 웃으며 보내주었다. 앞동산 자락에서 한 소쿠리를 다 채우고 잔디가 깔린 산소에 누워 무르익은 봄 해바라기를 하다가 넋을 놓고 잠이 들었다. 쌀쌀한 바람이 깨우지 않았다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잠을 잤을 것이다. 엄마는 나물 캐러 간 딸이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자, 이 집 저 집 내 또래 계집애들의 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너 자꾸 나한테 까불면 귀신이 혼내준다고 했어,라고 나는 해가 보낸 종이비행기에 휘갈겨 적고 꾸깃한 종이를 툭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