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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빠리 Sep 16. 2024

해, 천재로 태어난 아이(2)

나의 천재, 나의 개구쟁이

해, 천재로 태어난 아이 (2)


6 학년이 되어서도 해와 나는  같은 반이 되었다. 허기야, 전체 학생이  두 학급밖에 안 되니 같은 반이 될 확률은 반이나 되었다. 6 학년이 되니 남자 두줄과 여자 두줄, 성별로 나눠 앉게 되었다. 오 학년 때 날아오던 종이비행기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여자애들은 더 조용해지고, 남자애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장난에도 놀라고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오 학년때와 마찬가지로 종수가 반장선거에서 해를 이기고 또다시 반장이 됐다.

“너 누구 찍었어?”

 해가 하굣길에 자전거를 내 앞에 세우면서 물었다.

“너 5 학년 때 종수한테 손들어 주었잖아. 아, 씨이. 이번엔 비밀투표라서 알 수가 있어야지.”

 해는 반장자리를 놓친 것이 무척 서운했나 보았다.

“그래, 투정 부릴 데가 없으면 나한테 해. 난 어린애가 투정 부리는 거 다 들어줄 수 있어.”

나는 해에게 내가 그 아이보다 정신적으로 삼 년은 더 성숙하다고, 그 정도의 투정은 너그러운 누나 같은 마음으로 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해는 씩 웃으며 내게 꿀밤을 먹이고는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골짜기에서 걸어 나오던 해가 손을 흔들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나도 망설이다가 손을 흔들었다. 해는 파랑 폴로를 입고 있었고 나는 엄마의 빨강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신록이 파마머리 같은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온통 물들이고, 길이 이어진 곳마다 쇠비름줄기가 영토 따먹기를 하듯  뿌리를  넓혀 나가는 여름이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있다가 간혹 오수에 빠져들었고, 그럴 때면 자주 악몽에서 깨어나 허우적거리곤 했다. 절규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고, 작은 충돌에도 골절을 당하는 나는 온몸의 뼈가 가루처럼 부서져 소멸해 버리고 내 육체가 마술처럼 사라지는 환영 같은 경험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귀뚜라미만 울어대는 밤, 난 골짜기로 사라진  해가 언제쯤 어둠을 뚫고 걸아나올까 기다리다 마루에 앉아 잠이 들었다. 산골의 가로등 밑에 하루살이들이 모여들어 마지막 향연을 벌이는 사이,  유년의 내 여름밤은 해가 사라진 골짜기를 헤매다가  울고 있는 꿈을 반복했다. 어느 날은 내가 앉아 있던 텃 마루가 갑자기 홍수에 떠내려가는 꿈도 꾸었다. 휩쓸려가는 마루 끝자락에서 엄마와 아버지를 목청껏 불러대고 있을 때 해가 나타나 긴 통나무로 나를 구해주기도 했다.  

“엄마, 난 왜 자꾸 슬픔 꿈만 꾸는지 모르겠어. 아니 슬프다기보다 어디론가 자꾸 사라지거나 똑같은 장소에서 헤매는 꿈 말이야.”

엄마는 내가 허약 체질이라 꿈을 많이 꾸는 것이라고 했다. 내 병은 자라면서 괜찮아질 테니, 중학교에 들어가면 그런 꿈을 꾸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는 중학생이 되길 손꼽아 기다렸다. 동네 아이들과 마음껏 뛰어놀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이 즐기는 놀이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특히 아이들과 무릎까지 흰 눈이 쌓인 뒷동산에서 토끼를 쫓고, 비닐 썰매를 타고 싶었다. 쥐불놀이도 하고, 연을 날리거나 고주박을 모아 와 고구마를 구워 먹는 것도. 엄마는 조잘대는 나를 보며, 귀여여 죽겠다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엄마도 네가 그렇게 놀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어. 해처럼 공부 일등 안 해도 되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게 엄마 꿈이야.”

“그래도 난 해가 부러운걸 엄마. 그 앤 뭐든지 다 알아. 어떨 땐 질투가 나.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그 앤 만물박사처럼 다 알고 있어. 선생님들이 가르칠 때 뭔가 실수해도 해는 다 알아.”

엄마는 해가 어른처럼 성숙하고 영특하지만 아이들만이 갖는 순수함을 잃은 채로 고달프게 자라는 것 같다고 했다. 생각이 많고 한 참 뛰어놀 나이에 책에만 몰두하는 해. 엄마는 천재는 외로운 거란다,라고 했다.

 ‘엄마가 모르는 게 있어. 해가 천재이긴 하지만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지. 5 학년 때까지도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면서 놀던 아이라니까. 총명한 해가 어른들을 속이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입에서 맴도는 생각을 엄마에게 말하려다 말고, 그냥 키특대고 웃기만 했다. 사람들은 해를 조숙하고 신중하다고 칭찬했지만, 내 눈에는 개구쟁이에 응석받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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