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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빠리 Sep 27. 2024

빨강 자전거

보내지 못한 편지

빨강 자전거


“내가 태워 줄까? 요즘 학교 안 빠지고 다니는 네가 기특해서 특별히 태워주는 거야.”

해는 자전거 뒷자리에 자신의 재킷을 벗어 묶었다.

“네 엉덩이가 너무 말라서 그냥 앉으면 아플 거야.”

나는 망설이다가 내 스웨터를 벗어 해의 재킷 위에 덧대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탄 순간, 플라타너스 낙엽이 뒹구는 시월의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나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해의 허리를 꽉 잡았다. 그 순간,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묘한 설렘이 가슴 깊숙이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자전거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달렸다. 바퀴가 돌멩이들에 부딪힐 때마다 약간 불편했지만, 그보다 더 길고 지루할 한 시간을 걸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 넌 무슨 색을 좋아해?”

해가 물었다.

“내가 입는 옷들 중에서 가장 많은 색깔이 뭔지 알지? 그거야.”

“그게 뭐야?”

“빨강, 바보야.”

 “빨간색을 보면 가슴속에서 뭔가가 확 솟구치는 것 같아. 마치 용암처럼 뜨거운 열정 같은 거. 너무 강렬한 힘이 있지. 빨강은 절대 슬픈 색이 아니야.”

해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빨간색을 좋아하는지 이유를 말했다.

“그건 너무 주관적인 생각인데. 그러면 네가 생각하는 슬픈 색은 뭐야?”

“하얀색인 것 같아. 엄마가 생각나서. 엄마는 하얀색 꽃들을 좋아했거든. 싸리꽃, 찔레꽃, 백합, 아카시아 같은 향이 진한 꽃들 말이야.”

“슬픈 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운 색이나 행복한 색이라 생각해. 엄마를 떠올리게 하잖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너도 엄마처럼 그런 꽃들을 보면 즐거워하지 않았니?  언젠가 나한테 싸리꽃 한 다발 꺾어달라고 했던 거 기억나? 내가 골짜기에서 꺾어다 준 한 다발의 싸리꽃을 보고, 너랑 엄마가 함박웃음을 하고 얼마나 행복해하던지…..”

해는 내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까봐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멈추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리면서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하교 후 운동장에서 이틀 정도 연습하면 등하굣길을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되니 자신이 내게 아주 이로운 친구라고 강조했다.

“자전거 배우고 나면 저수지 둑도 달릴 수 있어. 너 저수지 가는 거 좋아하잖아. 거기서 달리면 기분 좋다. 특히 두 손 놓고 달리면 진짜 왕이 된 거 같아. 넌 왕비가 되고 싶지 않냐. 세상에 너만이 달릴 수 있는 길에서 말이야.”

해가 조잘조잘 떠드는 동안, 내 머릿속에선 이미 자전거를 타고 산골 마을의 비포장 도로를 벗어나,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오봉천 언덕을 넘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진 학교 정문에 들어서는 내가 스쳐 지나갔다. 꽃잔디가 납작하게 피어 있는 저수지 둑길 위,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물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나도 지나갔다

빨간색 자전거였으면 좋겠다,라고 나는 속삭였다.

“우리 큰형이 타던 자전거를 손 보면  될 거야. “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해의 큰형이 타던 자전거가 오랫동안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고 했다. 숙부가 페달에 기름을 쳐주고 낡은 타이어도 갈아 주었다. 나와 해는 페인트를 칠했다. 그렇게 아주 멋진 빨강 자전거가 탄생했다.

자전거 타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해가 몇 번 잡아 준 뒤, 나 혼자서도 충분히 운동장을 돌 수 있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동안 몇 번이나 넘어지고, 자전거 밑에 깔리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다리에 힘이 붙는 것이 느껴졌고, 속도를 내는 재미도 점점 커졌다.


 나는 어느새 웃음을 되찾았고, 병원에 가는 일도 줄었다. 얼굴도 다리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자, 숙부는 이제 병원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부모님을 여의고도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웃고, 새로운 것들을 해낼 수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빈집에서 웅크려 울던 그때, 나는 영원히 그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이 해였다는 걸,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사실, 몇 번이나 해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난다. ‘빨간 자전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슬픔에 잠식되어 결국 죽었을 거야.’라고 쓴 적도 있었고, ‘너 덕분에 다시 숨을 쉬고, 웃을 수 있게 됐어.’라고 적었다.  그 편지들은 끝내 보내지 못하고, 내 책상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된 채 남아 있었다. 그것이 미묘한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내 소심함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마치 내가 해에게서 정신적으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고 있는지 말해 버리면, 그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친구라는 틀 안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들, 그 경계를 넘는 순간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래서 내 진실은 언제나 어두운 서랍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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