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terdy (1)
오랜 세월의 연륜에도 퇴색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공명하는 기억들이 있다. 모두 유년의 단편들이지만, 나는 맹목적으로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리워할수록 추억의 단상들은 더욱 깊은 뿌리를 박았다. 잔뿌리마다 부모님의 얼굴과 해의 얼굴이 각인되어 자라나 내 사지를 뒤트는 듯했다. 그들의 끝이 비극이었기에, 행복한 기억들에도 슬픔의 음영이 드리워졌다. 환희와 고통의 기억들은 한 세기만큼의 물리적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갈마들며, 소멸해 버린 내 영혼의 뒤안길에서 비로소 재처럼 흩어질 것이다. 긴 손톱을 잘라내지만 곧 다시 자라는 것처럼, 그리움도 내 몸의 일부에서 기어코 재생되어 먼 과거의 골목으로 나를 이끌었다.
중학교 입학식에는 면소재의 크고 작은 국민학교에서 모여든 학생들로 북적였다. 남녀 공학이었지만, 현관문을 기준으로 여자 교실 세 반과 남자 교실 세 반이 나뉘었다. 겨우 두 학급, 백명도 안 되는 작은 국민학교에서 학생수가 몇 배는 늘어난 중학교에 입학하니, 숙부는 내가 새로운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의 건강이 좋아져 일상에 큰 불편함이 없었는데도 숙부는 시시때때로 교무실에 찾아와 만나는 선생님들한테 내가 허약하게 태어나고 부모를 일찍 여읜 아이니, 특별한 관심을 가져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럴때마나 숙부는 옥수수, 참외, 햅쌀이며, 참기름, 들깨, 고구마등을 선생님들이 나눠가져 갈 수 있게 소분을 해서 건네주느라 북새통 같은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교실에는 몇 십 가지 종류의 과자와 빵을 사 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덕분에 학교에서는 내가 부모 없이 크는 아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해는 IQ 높고 무슨 시험이던 올백을 맞는 완벽한 학생으로 그리고 종구는 키 크고 잘생긴 부잣집 아들로 입학 초기부터 유명세를 탔다.
십 대 중반이 되면 남녀 학생들 사이에 이성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마련이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여자 교실 앞 잔디밭에 우르르 몰려와 휘파람을 불거나,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담배를 피우며 도넛 모양의 연기를 만들었다. 경박한 여학생들은 그런 모습이 멋지게 보였는지 창문가에 매달려 그들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숙기가 없는 아이들은 현관문을 지나가다가 이성을 마주치면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그도 저도 아니었던 나는 틈만 나면 교실을 벗어나 조용히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사교성도 있었고, 잘생긴 총각 선생님이 수업을 하게 되면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의 마음을 대변해 선생님을 회유하기도 했다. 또한, 마음에 둔 남학생들에게 연애편지 대필을 해주어서 아이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연애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은 다른 반 아이들 사이에도 퍼졌고, 대필을 원하는 아이들은 꽃무늬 손수건이나 가나초콜릿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가끔 종구는 친한 남자아이들의 연애편지를 부탁해 왔고, 그 대가로 자신이 읽지 않는다는 세계 문학 전집을 한 권씩 가져다주곤 했다.
고학년들이 쓰는 학교 중앙건물 뒤뜰에는 꽃들의 군락지가 있었다. 냄새가 고약한 쓰레기 소각장을 지나야 해서 아이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산수유꽃이 지고 나면 , 개나리, 연달아 연산홍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뒷동산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큰 아카시아 나무들이 무리 지어 신록을 뿜어냈다. 그 길에는 낡고 작은 벤치가 있었다. 오월의 바람은 진한 아카시아 향기를 교실까지 몰고 왔다. 나는 지루한 수업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아카시아를 보러 갈 생각에 내심 들떠 있었다.
종례 종이 울리자마자 아이들은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들고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나는 소란스러운 교실을 빠져나와 아카시아 향을 따라 중앙건물 뒤뜰로 갔다. 아카시아는 포도송이처럼 가지마다 풍성하게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꽃향기가 따라 움직였다. 나는 낡은 벤치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작은 벌들이 바쁘게 꽃술 사이를 오가는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엄마는 꽃으로 화전을 만들거나, 생으로 떼어먹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아카시아는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꽃이었다. 아카시아가 만개할 때면 엄마는 종종 소쿠리에 가득 꽃과 잎사귀를 훑어와, 마루에 누워 있는 내 코를 간지럽히곤 했다. 나는 꽃잎을 입안에 넣으며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와 나는 꽃잎을 먹으며 한참을 웃다가, 초록 잎을 떼어낸 아카시아 잎사귀 줄기로 서로의 머리를 동전모양으로 말아 주었다. 어느덧 땅거스르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면, 엄마와 나는 수돗물에 아카시아 꽃잎을 띄운 빨간 고무 통을 준비했다. 모내기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땀에 젖은 윗옷을 벗으면, 엄마와 나는 그 물로 아버지의 등을 씻어주곤 했다. 그리고 셋이 일렬로 앉아, 아버지는 엄마의 머리, 엄마는 내 머리에 말아놓은 아카시아 잎사귀 줄기를 살살 풀어냈다. 마치 미용실에서 펌을 한 것처럼 멋진 웨이브가 생겨났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콤했던, 우리 세 식구의 행복한 저녁 시간이었다.
행복했던 그때가 꿈속에서 되풀이되는 사이 어딘가에서 기타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예스터데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노랫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이문세, 이선희, 전영록 같은 한국 가수의 노래만 듣던 나 같은 산골 촌뜨기에게 그 노래는 신세계를 동경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벤치에서 일어나 앉았다. 학교 울타리를 뒤로하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종수였다. 잠에서 깬 내 손에는 한 움큼의 아카시아 꽃이 들려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하얀 꽃잎과 더불어 종수의 노래는 귀를 간지럽혔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는 "예스터데이"를 포함해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종수가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는 꿈속의 행복을 연장해 주듯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야, 멋지다. 이게 무슨 노래야?”
종수의 연주와 노래가 끝난 후, 나는 손에 들려 있는 아카시아를 흔들며 종수를 바라보았다.
“꽃 딸 때 벌에 쏘이지 않았니? 정말 황홀한 향기야. 난 오월 같은 계절만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부른 노래도 오월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진짜 멋지다.”
“비틀즈를 몰라? '예스터데이'라는 곡이야.”
종수는 어깨를 으쓱대며 미소를 지었다.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수와 나는 대화를 멈추고 교실을 향해 뛰었다. 현관문에 가까워지는 순간, 창가에 매달린 몇몇 아이들이 우리 쪽을 향해 입술을 모아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마치 무슨 희귀한 광경을 본 것처럼, 하나둘씩 매달리기 시작한 아이들이 떼를 지어 창가에 모였다. 남녀학급 할 것 없이 야조리 창가에 매달려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의 시선도 생경스러웠다. 다만 종수와 나는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함께 뛰어가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갑작스러운 아우성에 나는 당황했고, 종수는 마치 영웅이라도 된 듯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와아, 뭐야 둘이서 몰래 언약식이라도 하고 오는 거야? 야, 너네들 일찍 까졌다.”
남자 반 쪽에서 웅변하듯 큰 외침이 들려왔다. 기타를 메고 있는 종수와 아카시아를 한 움큼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아이들이 오해할 만한 풍경이었나 보았다. 뒤에 따라오던 몇몇 선생님들도 우리를 불량한 학생 보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종수를 뒤로 하고 더 빠르게 뛰어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의 아우성은 선생님들이 각 학급으로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온 나를 향한 반 아이들의 함성은 수학 선생님이 들어와 출석부로 교탁을 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요놈 봐라, 연애만 하지 말고 수학 공부 좀 해라. 수학 공식 하나도 제대로 못 외우면서 연애할 시간은 있냐?”
수학 선생님이 내 앞으로 와서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을 치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수학 공식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선생님. 여자애들의 우상, 종수를 경아가 차지했는데 그깟 수학 좀 못 하면 어때요.”
스프레이로 앞머리를 잔뜩 세운 희수가 한마디를 던지자, 아이들의 폭소는 멈추지 않았다. 학급 분위기를 해이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그날 수학 시간 내내 희수와 나는 복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카시아 향기에 이끌려 엄마 생각을 하며 학교 뒤뜰로 갔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휘말린 봄날 오후였다. 누구에게든 그게 아니라고 해명해도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종수와 내가 마주치기만 해도 ‘그림 좋다’며 장난치듯 놀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