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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빠리 Oct 04. 2024

Yesterday (2)

해의 휘파람

Yesterday (2)


5월이 지나면서, 해는 혼자서 등교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해를 기다리다 결국 지각을 하곤 했다. 이후 내가 해의 집에 들러 함께 등교하려고 하면 이장님은 '일찍 가서 공부한다고 벌써 나갔다.’라면서 나에게 등을 돌렸다.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여름 방학이 가까워지도록 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 교실을 기웃거릴 용기는 없었고, 쉬는 시간에 혹시나 마주칠까 싶어 현관에서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주치는 사람은 종수였다.


수돗가를 지나 매점으로 이어지는 작은 천막 안에는 자전거를 세워두는 공간이 있었다. 등교 시간에도, 하교 시간에도 해의 자전거는 늘 맨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 날, 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는 생각에 수돗가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 어둑해질 무렵, 익숙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Yesterday’ 멜로디였다. 휘파람을 불며 다가온 해는 나를 보자 놀란 듯 휘파람을 멈췄다.

"너도 그 노래 알고 있었구나. 나만 몰랐네, 그런 멋진 노래를."

오랜만에 해를 만난 반가움을 잠시 접어두고, 'Yesterday'를 휘파람으로 부르며 다가오는 해에게 물었다. 그러나 해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 나쁜 놈아, 갑자기 왜 그래? 등교할 때도 혼자 가고. 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냐고?” 

나는 악을 쓰면서 급히 해를 쫓다가 수돗가 난간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무릎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며 하얀 양말을 물들였다. 내 비명 소리를 들은 해가 놀라 달려왔다.

“조심 좀 하지. 너 이러다 또 병원 신세 지겠어. 여자애가 왜 이리 칠칠맞지 못하냐?.”

해는 피가 흐르는 내 무릎을 물로 먼저 씻어내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낸 미색 손수건으로 내 무릎을 감쌌다.

“걸을 수 있겠어? 일어나 봐.”

해는 내 무릎에 골절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선혈이 흐르긴 했지만 통증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해를 기다리며 쌓인 서운함에 속이 상해, 일부러 엄살을 부리고 싶었다.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아파서 자전거 페달을 밟을 수 없을 것 같아.”

내 예상이 맞다면, 해는 내 자전거를 학교에 두고 나를 집까지 데려다준 뒤, 이튿날 등교 시간에 맞춰 다시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할 터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마지못한 척하며 해의 자전거에 올라탔지만, 속으로는 해에게 들키지 않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Yesterday 말이야, 넌 그 노래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난 얼마 전에 그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오래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멜로디 같기도 하더라고. 내 주변 여자애들은 이문세나 이승철 노래에 푹 빠져 있어서 나도 그렇고. 그런데 그 노래를 알고 나서부터는 이상하게 그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가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계속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돼.”

해의 허리를 두 손으로 꼭 잡고 머리를 기대려다 말고, 나는 해에게 물었다. 아카시아 숲에서 종수가 부르는 노래를 감상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학교 운동장을 막 벗어나 면내 시장터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상점에서 ‘심수봉의 미워요’가 외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기억해 봐. 너도 언젠가  Yesterday 멜로디를 들은 적이 분명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넌 물고기처럼 기억력이 짧은 것 같아.”

"그래, 너 잘났다. IQ 높은 사람은 좋겠어. 남의 과거까지 다 기억하고. 내가 어디서 그 노래를 들었는지 네가 어떻게 확신해? 그냥 어디선가 들어본 친근한 멜로디라고 했을 뿐이야. 데자뷔 같은 현상인 거지."

나는 해의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치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심수봉의 노래를 따라 크게 노래를 불렀다. 

"남자, 남자, 남자의 작별이 미워요.. 오." 

시장터를 벗어나 들녘으로 접어들 때,  우리 앞에 이글거리는 석양이 지평선을 발판 삼아 타오르고 있었다. 붉고 주황색의 따뜻한 빛이 하늘을 물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나는 해와 함께 탄 자전거가 마치 달나라로 날아가는 우주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영원히 행복한 세계가 있다면  날개를 달고 해와 함께 날아가고 싶었다. 시나브로 하늘의 따뜻한 빛이 내 가슴속으로 퍼져 나갔다. 해는 다시 휘파람을 불었고, 'Yesterday'의 멜로디가 바람을 타고 메아리쳤다.


다음 날 나를 태우러 온 해는 카세트테이프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마이마이를 내게 주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팝송들을 직접 녹음한 것이라며, 맨 처음과 마지막에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넣었다고 했다. 해가 준 테이프에는 엘튼 존, 비지스, 시카고, 에릭 카멘, 그리고 앤 머레이와 같은 감미로운 목소리의 가수들의 노래도 담겨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고 처음 들어본 외국 가수들이었다.

“이 테이프만 있으면 누군가가 불러주지 않아도 오랫동안 ‘Yesterday’를 들을 수 있어. 태어나서 가장 슬펐던 날을 생각해 봐. 너는 그때 이 멜로디를 이미 들었어.”
나는 해가 말한 ‘태어나서 가장 슬픈 날’을 기억해내려 했다. 그건 부모님의 장례식이었는데…. 그때는 상여소리 외의 그 어떤 노래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어찌 됐든 나에게 그것을 기억해 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Yesterday’라는 영어로 된 노래를 듣고 신비한 경험을 한 듯한 희열과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위로를 느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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