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운명의 불협화음
나는 점차 팝송에 관심이 생겨 팝 사전을 사서 외국 가수들의 이름을 달달 외우고 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해와의 대화가 더 풍부해지길 바랐고, 해가 알고 있는 음악 지식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팝송의 리듬과 가사가 내 일상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나는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는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나는 음악감상실 디제이가 될래.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
팝송을 접하기 시작한 나는 마치 장래 희망을 찾은 듯 기뻐하며 말했다.
“넌 뭐가 되고 싶어? 이장님이 원하는 대로 의사가 될 거야? ”
"그래야겠지. 아주 어릴 땐 사실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구속력이 없다면 멋진 화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돼보고 싶기도 해. ”
"와, 파일럿이라니! 정말 멋지겠다.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잖아. 그게 왜 불가능하다는 거야? 비행을 하고 와서 쉴 때는 화원을 가꾸면 되잖아. 너처럼 똑똑한 애가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게 어디 있냐고!”
"불가능하다는 건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다는 의미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지. 어떤 사람은 너처럼 태어날 때부터 신체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결함을 안고 살아. 그래서 나는 파일럿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어."
“보이지 않는 결함? 그게 뭐야? 왜 결론을 벌써 내려? 우린 겨우 열네 살인데.”
나는 해가 말하는 결함과 장애물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사는 나 같은 사람은 파일럿이나 의사 같은 어려운 일을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천재인 해가 그걸 못 해낼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비밀이야. 넌 몰라도 돼. 학교에 다니는 게 지루해. 검정고시를 봐도 대학 가는 건 문제없겠지만, 아버지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생각하셔. 난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어. 내가 내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해는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나는 해의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 해로 하여금 자신의 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단순하게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저 해의 확고한 철학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그 깊은 내면을 헤아리기엔 한참 부족했다.
학교에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느낀 해는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책들을 읽고 있었다. 해는 자신이 읽고 있는 것들이 심리학 연구서, 천체에 대한 과학 서적, 노동 시인들의 시, 보를레르와 바이런의 시라고 했다. 책만 펴면 금세 졸아버리던 나의 무지가 부끄러울 정도로, 해는 점점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멀리 내가 아는 세상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해는 삶의 이면과 세상의 부조리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일까. 해는 책을 통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파헤치려는 듯 보였고, 나에게는 그 깊이와 넓이를 다 헤아릴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아이가 더 자주 웃고, 자신이 원하는 꿈을 찾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상 궤도를 과감히 벗어나기를 바랐다. 세상이 원하는 틀 안에서 그가 갇혀버리기 전에,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길 바랐다. 하지만 해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지극히 모범적으로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반항하거나 이탈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조용해지고, 더 깊이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해 가는 듯했다. 나에겐 그런 해의 모습이 불안하게 보였다. 왜 해는 그렇게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배우려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속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학교 생활을 놓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을 학문과 지식에 담금질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해를 ‘이상한 천재’, '미친 천재', '벙어리 천재 '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는 그런 별명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시선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 상관없다는 듯,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해를 향한 아이들의 시선에는 냉소와 경멸이 깃들어 있었고,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도 엿보였다. 마치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할 때 느끼는 불편함과 거리감이었다. 해의 뛰어난 지적 능력과 차가운 침묵은 아이들에게 경외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들은 해가 자신들의 바운더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그를 철저히 외톨이로 따돌렸지만, 내 눈에는 오히려 해가 아이들을 상대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해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처럼 보였고, 그 결과 누구도 해의 세계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해의 이런 태도는 차갑고 고립된 듯했지만, 동시에 그만의 고요한 결의가 엿보였다.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선을 그어놓은 듯했다.
어느 순간, 나는 해가 그어 놓은 선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자각은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상처럼 무한한 거리감을 주었고,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해의 고독은 나에게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다가왔고, 마치 몸에 난 흉터처럼 영원히 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해가 읽는 책들, 해의 사색, 그리고 해가 만들어 놓은 선 너머의 세계는 신기루처럼 내가 닿을 수 없는 환영의 세계였다. 내가 그 세계를 결코 소유하거나 만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