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빠빠리 Oct 11. 2024

벽조목

재회 그리고 또 이별

벽조목


숙부의 약속대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청주에 있는 여학교로 진학하면서 이모네 집으로 옮겨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해는 결국 이장님과 몇 번의 마찰 끝에 큰형이 있는 서울로 옮겨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중학교 졸업식이 끝나자, 종수와 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해가 서울로 가도 내가 있으니 걱정 마라. 우리 학교가 너희 학교 바로 옆이잖아. 도시 깍쟁이들이 너 괴롭히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종수는 마치 내 친오빠인 양 내 어깨를 감싸며 해를 보았다. 하지만 나와 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해에게 엽서를 보냈다. 등굣길에 우연히 종수를 자주 마주친다는 말도 했던 것 같고, 무심천에 벚꽃이 만개할 무렵, 수업을 몰래 빠져나와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는 이야기며, 음악감상실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사소한 일상을 짧게 적어 보냈다. 해가 보고 싶을 때마다 큰형과 함께 사는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신호음이 두세 번 울리면 그냥 끊어버리곤 했다. 매일 일기장에 해에게 편지를 쓰듯 아무 말이나 쏟아냈다. 나의 열일곱, 열여덟은 아주 느리게 갔다. 방학 때마다 청주에 온 해를 만나긴 했지만, 해는 언제나 종수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진학하는 동안 나는 낮에는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저녁엔 음악카페에서 디제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간은 무의미하고 건조하게 흘러갔다. 내 주변은 계속해서 움직였지만, 나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저 하루를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어디로든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아주 먼 곳으로. 낯선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삶을 설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끊임없이 나를 구속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출국을 하루 앞두고 해를 만났다. 3년 만의 재회였다. 해는 더 이상 내가 기억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일류대에 다니는, 우람하고 당당한 청년. 젊음이 한껏 차오른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입고 있던 회색 목폴라와 검은 재킷은 단정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낡은 청바지에 이모가 물려준 회색 바바리를 걸친 내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인 해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스피커에서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검은 돛배'가 끝나고, '고백할 수 없는 사랑'이 이어졌다." 

“이 가수가 누군지 아니? ”

해가 침묵을 깼다. 

“네가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음악 감상실 아르바이트를 3 년씩이나 한 내가 모를 까봐 물어보는 거야?”

해의 이지적인 모습이 낯설어 나는 깍쟁이처럼 쏘아붙였다.

“누군지 몰라서. 음악이 맘에 들어.” 

“파두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야.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 같은 멍청이도 이럴 땐 너 같은 천재에게 쓸모가 있으니 말이야.” 

“천재라는 말 그만해. 나는 천재가 아니야. 그 말이 주는 어감이 너무 무섭고 싫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난 네 머리 반에 반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구먼. 지금 들리는 노래 말이야, 제목이 직역을 하면 ‘나는 벽에게조차 내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라는 곡이야. 깊은 사랑에 빠져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고독한 심경을 노래한 건데,  그럼으로써 세상 모든 것이 무너져도 자신의 사랑은 영원할 거란 걸 확신하는 거야.”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사랑을 왜 선택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그런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거야?”

해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당연히 영원하지. 아무도 모르니까. 소문처럼 떠돌며 과장되거나 축소될 일도 없고, 상호 간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별할 걱정도 없지. 벽에게도, 신에게도 고백하지 않았으니 오직 혼자만 간직한 채 그 비밀을 품고 사라지겠다는 결의는 완벽한 영원함으로 귀결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나는 말하면서 해의 표정을 살폈다. 해의 눈동자는 순간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나를 응시했다. 

“영원한 사랑을 원했다면 용기 있게 고백하고, 더 치열하게, 투쟁해서라도 쟁취했어야지. 수동적이고 노력 없는 사랑이 영원하길 바란다는 건 모순이야. 타당성 없는 소유욕이고 의미 없는 사랑인 거지.”
해는 커피에 설탕 두 스푼을 넣으며 담담히 말했다. 해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로운 동시에 논리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했다. 정말 해가 말하는 대로 비밀스러운 사랑은 의미 없는 것인가. 애초에 고백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 감정은 사랑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럼 네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커피잔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신 후,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랑은 노력이고, 관계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이지. 마음을 숨기고 혼자만 품고 있다면 그건 단순한 환상일 뿐이야. 진짜 사랑은 서로에게 다가가서 함께 만들어가는 거야. 때로는 상처를 받고, 싸우고, 다시 화해하면서 말이야. 영원함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거지. 혼자만 간직한 사랑은 결국 사라질 뿐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비밀스러운 감정을 이제는 말해야 할까? 나는 애먼 손톱의 거스러미를 뜯고 있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고백할 수 없는 사랑’ 이 끝나고 커트 코베인의 ‘All appogies’가 흘러나왔다. 해에게 커트 코베인이  2년 전에 자살을 했다,라고 말하려는데 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바나. 커트 코베인 다운 그룹이름이야. 커트 코베인은 죽어서 피안의 세계로 갔을까? 너무 유명해지는 것이 무서워 요절한 가수, 그는 세상의 편견과 부조리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을 거야.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해의 말에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 세상의 부조리에서 도망치려 했던 것처럼, 해 역시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해는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커피잔을 비우고는 곧바로 또 한 잔을 주문한 뒤,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호주? 거긴 왜 가는 거야?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이야? 낯선 곳으로 가는 게 두렵진 않니? 그렇게 멀리 갈 거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네가 떠난다는 소식을 종수한테 들었어.” 

해는 내가 한국을 떠난다는 것을 종수를 통해 들었다는 사실이 내심 서운한 듯했다. 비자 수속을 마치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었다. 우연이라도 해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리고 한국을 곧 떠난다는 소식을 직접 전하려고. 약속 없는 만남을 기대하며, 고속버스 안에서 두 시간 내내 나는 창밖으로 흩어지는 늦가을의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나는 해가 다니는 학교 앞을 한참 서성이다가 결국 다시 발길을 돌렸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여기 남는다고 해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 스물두 살이나 됐는데, 이젠 이모에게서 독립해야 할 때잖아. 가능하다면 좀 더 먼 곳으로 가보고 싶어." 

해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갔었다는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나는 커피잔을 돌리며 말했다.  

“그곳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이잖아. 세계 지도를 보다가 호주에 눈길이 갔어. 그곳에  만 개가 넘는 해변이 있다고 하더라. 일주일에 하나씩 가도 200년이 넘게 걸릴 시간이야. 다이아몬드 베이, 에메랄드해변, 사파이어해변 등 이름이 아주 값비싼 보석 같은 해변들도 있어.”

“단순히 그 많은 해변들을 보러 간다는 거야?”

"그런 목표라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거야. 비현실적일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여기서 못 들어간 대학이라도 다녀보고. 예전에 네가 골짜기에 가면 평온해진다고 했잖아. 호주에 가면 나도 그럴 것 같아. 지난 몇 년 동안 많이 무기력했거든.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해."

“무기력함에서 벗어나려면 큰 변화가 필요하긴 하지." 

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제 서로 다른 하늘을 바라보겠네. 나는 북두칠성이 떠 있는 하늘을, 너는 남십자성이 비추는 하늘을. 그곳은 여기와 계절도 반대로 흐르겠지. 이질적이고, 너무나도 상대적인 거리감이야."

해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전기 스위치마저 여기와는 반대로 돼 있다던데.'라고 한마디 덧붙이더니,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나무토막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거 벽조목이야. 벼락 맞은 대추나무라고 들어봤어?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걸 몸에 지니고 다니면 액운을 막아주고 행운을 가져다준대. 너한테 뭘 줄까 고민하다가 이걸 샀어. 이제부터 이걸 수호신처럼 여겨."

 "벼락 맞은 대추나무라니, 신기하네. 대추나무가 벼락에 맞을 확률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정말 그런 힘이 있을까?"

나는 신기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벽조목을 손끝으로 살며시 만져 보았다. 매끄럽고 단단한 감촉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그저 작은 나무 조각일 뿐이지만, 왠지 낯선 곳으로 가는 나에게 힘을 줄 것만 같았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돌아와. 그리고 이제 좀 더 행복해져야 해.”

카페를  나오면서 해가 마치 악수를 청하듯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해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서늘하게 가슴에 파고들었다.  해에게 무어라 말을 더 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과 잡은 손을 영원히 포개고 싶다는 의뭉스러움이 내 머릿속에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해가 남긴 따뜻한 온기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그때 해가 준 벽조목은 내 침대옆에 놓아두었다. 그것을 가슴에 꼭 안아 보았다. 손에 쥔 벽조목은 잠시나마 해와 함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그리움과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벽조목 덕분이었을까? 한국을 떠난 후 나에게도 조용한 행복이 찾아왔다. 낯선 곳에서의 바쁜 일상은 늘어지기만 하던 무기력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가끔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던 고향에 대한 생각이나 해에 대한 아련한 기억으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나는 그럭저럭 모든 균열들을 잘 견뎌내고 있었다. 적어도, 해의 죽음을 알기 전까지는. 


해의 죽음은 나에게 불면과 식욕 부진,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고립을 불러왔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채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었고, 사람들과의 대화는 점점 끊어졌으며, 무기력한 나날이 이어졌다. 자주 꿈속에서 해를 만났다. 꿈속에서 해는 자전거를 타며 아이처럼 웃었고, 때로는 지붕 위에서 휘파람을 불거나 숲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런 꿈을 꾼 후엔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다. 꿈속의 순간들이 너무 생생해서, 깨어난 현실은 더욱 쓸쓸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해의 웃음소리와 자전거 타는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해와 함께한 유년의 추억들도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내 안에서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듯했다.

이전 09화 고독한 천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