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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빠리 Oct 14. 2024

고향에서 온 편지

해의 마지막 편지

고향에서 온 편지


경아 양,

내가 누군지 기억할 거라고 믿어요. 경아 양을 마지막으로 본 건, 경아 양 부모님 장례식 때 상여 옆을 따라가던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 우리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면 서로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해의 소식은 이미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해는 고향의 골짜기에서 영면하고 있어요. 자신의 유골이 그곳에 뿌려지기를 원했으니까요. 벌써 2년이 지났다니, 시간은 정말 무심하네요. 혼자서 모든 것을 잘 해결하고 적극적이던 아이가 왜 갑자기 그렇게 떠났는지…. 마지막 날은 나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카드놀이도 하면서 세상 걱정 없이 호탕하게 웃었는데 왜 그렇게 무서운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술기운에 잠들어 아무것도 몰랐던 나 자신이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에요. 아버지는 동생을 지키지 못한 나를 한동안 외면하셨어요. 


경아 양에게 남긴 해의 편지를 동봉합니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이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어요. 해가 떠난 후, 아버지의 삶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아버지는 끝내 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해의 장례식마저 거부하셨고,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도 점점 쇠약해지셨습니다. 여러 합병증이 나타났고, 무엇보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생활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결국 지난달 병세가 악화되어 운명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는 해의 편지를 꼭 경아 양에게 전해 달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기셨어요너무 늦게 보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전해주라고 했어요. 문득 경아 양은, 어쩌면 해가 왜 그렇게 떠났는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의 큰형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아들을 잃은 이장님의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똑똑한 막내아들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던 이장님이었기에, 그 슬픔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죽기 전에 쓴 유서가 서른 장이 넘는다'라고 해의 죽음을 알려주던 희수의 말이 떠올랐다. 서른 장이나 되는 유서의 수신인이 나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장님이 그동안 해의 유서를 내게 보내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이유는 아마 해의 마지막 흔적을 오래도록 품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내가 부모님의 유품을 쉽게 놓지 못하고 파고들었던 것처럼, 이장님도 해의 흔적을 품은 채 그리움을 떨쳐내지 못했을 것이다.  


해의 자살은 절대적인 공허였고, 동시에 그를 사랑했던 나의 삶에 절망의 깊은 흉터를 남겼다. 아무리 뼈아픈 슬픔이라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말은 나에겐  전혀 와닿지 않는, 헛된 관념에 불과했다. 그 슬픔의 무게는 세월이 흘러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내 마음속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시간은 그저 그 아픈 사건으로부터 해를 그리워하는 나를  조금 더 멀리 떼어놓을 뿐이었다. 아무도 해가 그렇게 황망히 떠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누구도 그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잃은 아픔 역시 오롯이 남은 자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나는 일찍이 지독한 슬픔의 무게를 견뎌본 사람이기에, 또 다른 슬픔 앞에서 내 몫의 비애를 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해와의 짧은 만남이 가슴 시리게 떠 올랐다. 

‘영원한 사랑을 원했다면 용기 있게 고백하고, 더 치열하게, 투쟁해서라도 쟁취했어야지’ 

‘혼자만 간직한 사랑은 결국 사라질 뿐이야’ 

‘서른이 되기 전에 돌아와.’

해가 했던 말들이 머리를 꽉 메웠다. 이제 나는 곧 서른이 된다. 해가 남긴 마지막 편지를 받고 나서, 나는 영영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털어내지 못한 말들은 여전히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고 있는데,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벽에게조차 고백하지 않은 내 비밀'의 궤적은 해의 말대로 결국 의미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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