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없는 여자의 자화상
1995년 가을의 초입이었던가. 나는 난생처음으로 홀로 팝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갔다. 그것도 보통 가수가 아니라, 감미로운 목소리로 세상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무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공식적으로 질투(!)를 받았던 그 사람. (하루키는 소설 '밤의 거미원숭'이에서 그를 노골적으로 조롱했다지 않던가.) 스페인출신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 특유의 달콤한 목소리로 뭇 여성들의 심장을 한 번에 녹여버리던 남자.
사실, 나는 그의 광팬은 아니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좋네” 하고 흥얼거릴 정도였을 뿐이다. 하지만 라디오나 레코드판에서만 듣던 목소리를, 그것도 눈앞에서 직접 듣는다는 건—가문의 영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 브룩 쉴즈도 그 잘생김과 감미로움에 홀려 몇 번 데이트까지 하지 않았던가.
티켓 번호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기도 전부터 심장은 떨렸다. 올림픽 체조경기장의 규모는 아득했고, 몰려든 관객의 물결은 숨이 막혔다. 지방에서 상경한 지 몇 달 안 된 내 눈엔, 서울이란 도시의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그러니 생애 첫 팝 공연 관람이 낯설고, 그 낯섦이 설렘으로 번지는 건 당연했다.
좌석이 거의 다 찰 무렵, 내 옆자리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발라 올백으로 넘기고, 무대에라도 설 기세로 반짝이는 의상을 걸친 남자였다. 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황급히 손바닥으로 얼굴 전체를 쓱 문질렀다. 뭐 묻었나? 코에 파리라도 앉았나? 아니면 오늘따라 내 민낯이 너무 광채를 뿜었나? … 뭐, 됐다. 나는 오늘 오직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를 보러 온 것이니까.
첫 노래가 시작되고, 곡이 두어 개 흐르는 동안도 옆자리에 앉은 올백 남자는 힐끗힐끗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홱 돌렸다.
‘이 자식, 내가 예쁘면 말을 하든가. 왜 자꾸 몰래 훔쳐봐?’
잠깐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곧 주제 파악에 능한 나는 현실을 직시했다. 부모님이 공들여 빚어주신 자연산 상위 90%의 외모라지만, 그날의 나는 편한 캐주얼 차림—말하자면 공연장 패션계의 최하위권이었다. 그런 내가 남자의 시선을 받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나를 훔쳐봤다. 공연 중반쯤엔 그 힐끗거림이 은근히 짜증 나는 무언의 공격처럼 느껴져, 당장이라도 따귀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러나 훌리오의 목소리는 모든 분노를 녹여내는 버터였다. 세상의 거친 것들을 다 녹여버릴 것 같은 감미로움. 그렇게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마지막 곡이 끝나자 그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관례대로라면 곧 앙코르가 이어질 터였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불러냈지만, 십여 분이 지나도록 그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하나둘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아, 저 싸가지. 목소리도 감미롭고 얼굴도 번듯한 놈이 매너는 태평양에 빠뜨리고 왔구먼.’
공연 전의 설렘이나, 생애 처음으로 찾아온 공연의 흥분은 사라지고, 팬심이 부족한 가수의 인성에 나 또한 적잖이 실망한 채 사람들 틈에 섞여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몇 분쯤 걸었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돌아보니, 옆자리 올백 남자였다.
“실례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결국 내 미모를 잊지 못해 번호를 따러 쫓아온 거군. 순간, 우쭐해졌다. 내 인생 2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저, 실례지만… 공연 티켓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엥? 요즘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작업을 거나? ‘차나 한잔 하실래요?’도 아니고, ‘연락처 좀 주시겠습니까?’도 아니고, 티켓 출처라니.
“그런 건 왜 물으시는데요? 제가 어디서 티켓을 훔쳐서 공연을 보러 온 사람 같나요?"
“아,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실은…”
남자는 입술을 오므리며 머뭇거렸다.
“사실 그 티켓… 제가 산 겁니다.”
뭐라는 거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아니고.
“아니 아저씨, 본인 자리 앉아서 공연 잘 봐 놓고 왜 이제 와서 남의 티켓이 자기 거라고 우기세요? 별꼴이네.”
나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고는 잠실 지하철역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티켓, 제가 산 게 맞습니다. 오늘… K가 나 올 줄 알았어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지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이었다.
머리는 복잡해졌지만, 이 남자의 사정은 금세 그림처럼 그려졌다. K는 나의 직장 선배였다. 탤런트 같은 외모를 가진 그녀는 여리고 아름다워 보호해주고 싶게 만드는 여인이었다. 사회 초년생이던 내게 그녀의 인간적인 따뜻함은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여왕을 모시는 시녀처럼 그녀 곁을 따라다녔다. 주말이면 그녀는 나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을 먹게 했고, 화장에 서툰 내게 섹시하게 화장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회사에서도 그녀는 남자들의 시선과 친절을 독차지했다. 게다가 친척이 소개해 준, 소위 잘 나가는 스펙 좋은 남자친구까지 있었다.
“혹시… 소장님?”
내 물음에 그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K가 종종 그 남자 얘기를 했었다. 매일 전화를 하고, 끊임없이 선물 공세를 퍼붓는 남자. K는 그가 준 값비싼 가방과 시계를 내게 자랑하듯 보여주곤 했다.
"언니, 그 건축 소장이란 사람, 사귈 생각도 없다면서 그런 선물 받아도 돼? 게다가 남자친구랑은 결혼까지 생각한다면서.” 내가 묻자, K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자기가 좋아서 선물 주는 건데, 내가 굳이 마다할 필요가 있니? 소장님은 내 취향 아니야. 나이도 많고 키도 작고. 난 나보다 키 작은 남자는 사양.”
나는 K의 모든 게 좋았지만, 이런 태도만큼은 별로 탐탁지 않았다.
“언니, 안 만날 거면 선물은 받지 말고 전화도 끊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 남자친구까지 알게 되면 둘 다 상처받을 거 같아.”
그러자 K는 나를 힐끗 보더니 툭 내뱉었다.
“걱정도 팔자다. 넌 소개팅도 한 번 못했다며? 너나 잘해.”
얼마 전, 그녀는 내게 공연 티켓을 내밀었다. 행사에서 공짜로 당첨됐는데, 자신은 팝에 관심 없으니 버리기 아까워 나더러 가라는 거였다. 나야 무조건 땡큐베리마취였다. 이런 문화생활은 꿈도 못 꾸는 주머니 사정이었으니까. 티켓을 받아 든 나는 K가 좋아하는 롯데리아 버거를 사주었다.
밤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왔다. 올백머리 남자를 보자 이상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공연 내내 그가 집중하지 못하고 나를 힐끗거리던 건, K 대신 낯선 내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마 그는 공연 티켓을 K에게 전해주며, 그날 꼭 그 자리에 그녀가 앉아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건, 세련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촌티 가득한 나였다. 그가 느꼈을 실망과 당혹감이 고스란히 내 얼굴로 옮겨와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이 구매한 좌석에 앉아 팝 가수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여자가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그 어떤 설명도 없었으니 그는 내내 힐끗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에 선 남자를 향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이럴 수가. K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나를 대타로 내보낸 것일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이라도 해주고 티켓을 주던지. 내가 그토록 여왕처럼 따랐던 K에 대한 원망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니, 어쩌면 K는 이미 짐작했을 것이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면 내가 거절할 거라는 걸. 그래서 일부러 이벤트에 당첨된 것처럼 꾸며낸 게 분명했다.
“저기… 출출하지 않으세요? 포장마차 가서 우동이나 야식이라도 사드릴까요?”
나는 머쓱하게 말을 꺼냈다.
“아니요. K에게는 아무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일방적이었던 겁니다. 그래도… 저는 K가 올 줄 알았어요.”
그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인사도 없이 빠르게 걸어갔다. 화려한 재킷 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였다. 나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올백 남자, 그 소장이라는 남자의 힐끗거림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K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자신의 기대감과 다른 낯선 여자의 행색을 보며 당황했을 그의 표정이 비장하게 기억 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서글픔과 함께 묘한 우스꽝스러움도 느꼈다.
그 사건 이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감미로운 노래들은 더 이상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직장 선배 K에 대한 서운함의 기억이자,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한 한 남자의 쓸쓸한 그림자를 불러오는 음악이 되었다. 아, 그리고 내 젊은 날의 코미디 같은 비극을 배경음악처럼 되살려주는 멜로디가 되어버렸다. 대타로 공연장에 끼어든 24살 촌뜨기의 민망한 청춘극을 영원히 배경음악처럼 틀어주는, 지독히 웃픈 BGM 말이다.
오늘의 BGM
https://www.youtube.com/watch?v=pqsfiOAxRNo
https://www.youtube.com/watch?v=YfUvZPvwN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