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달인(2)

나에게도 연하의 썸남이 생기려나 보다.

by 빠빠리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완벽하게 짜인 옴니부스식 드라마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같은 계절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비슷한 상황, 직장 동료와 얽힌 사연들, 그리고 그 공간적 배경은 유명한 팝 가수들, 아버지와 아들의 콘서트 현장.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Julio Iglesias) 내한 공연을 보러 간 해가 1995 년 서울의 가을, 그의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Enrique Iglesias) 호주 공연을 보러 간 것은 2004년 시드니의 가을이었다.


2004년, 나는 시드니의 한 통신사 마케팅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회사가 확장되면서, 외주로 맡기던 웹사이트와 광고물, 그리고 협찬 홍보까지 직접 기획할 그래픽 디자인팀을 구성하자는 임원회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 즉시 메인 디자이너가 고용되었고, 디자이너 S의 자리는 임시로 내 옆자리에 배정되었다.


S는 호화스럽지만 동시에 단정한 남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었지만, 전혀 과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화롭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아이디어와 작업물은 늘 완벽했고, 그럴 때마다 내 입에서는 절로 “와”라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건,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는 차갑고 사무적으로 대하면서도 나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게 웃어주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종종 콩글리시 발음 때문에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S는 “너희 중에 영어 말고 다른 언어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라며 내 곤란함을 막아주곤 했다. 회의 시간에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을 때는, 종이에 단어를 슬쩍 적어 건네주며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S와 함께 근무한 지 6개월이 다 돼 가고 있었다.

" J, 콘서트 가는 거 좋아해?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공연이 이번 금요일에 있는데 함께 가지 않을래?"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S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 당시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는 라틴계 리키 마틴 (Ricky Martin)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가수였다. 더군다나 러시아의 테니스요정 '안나 쿠니코바(Anna Kournikova)'와의 열애설로 인기가 더 치솟아 있었다.

"좋지. 또 누가 조인하는 거야?"

"너와 나만 둘이. 나한테 VIP 티켓 두장이 있어."

S가 VIP 티켓 두장을 그의 지갑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좀 부담이 되긴 했지만 나는 티켓 값을 S에게 치러 주겠다고 말했다.

"Oh No. 그 콘서트 광고 포스터 그래픽을 내가 만들었어. 보너스로 티켓까지 받은 거니까 절대 부담 갖지 마."


서른 중반의 모태 솔로였던 나, 자칭 프로 착각녀의 뇌가 설레는 생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야, 나를 VIP 티켓으로 콘서트에 초대한다고! 어머, 어쩌면 좋아, S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봐.. 드디어 나에게도 8살이나 어린 연하의 남자 친구가 생기는 것인가...


“고마워, S. 그러면 내가 저녁 살게. 콘서트 전에 차이나타운에서 먹자.”

나는 망설임도 없이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냐, 저녁은 각자 해결하고 콘서트장 입구에서 만나자. 난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

알지, S. 네가 얼마나 세련된 남자인지. 귀하신 몸 치장하려면 한참 걸리겠지. 나는 장난스럽게 "Of course!"를 세 번이나 반복하며 맞장구쳤다.


드디어 금요일이 왔다.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겠노라며 사무실을 나선 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세련된 S와 균형을 맞추려면 나도 한껏 차려입어야 했다. 파티복들을 모조리 꺼내어 나름 최고로 멋진 옷을 골라 입고, 평소엔 잘하지 않던 화장까지 공들여 마무리했다.


달링 하버 (Darling Harbour)에 있는 엔터테인먼트 센터(Entertainment Centre)로 가는 동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S는 이미 공연장 옆에 와 있었다. 아, 빈틈이 없네 이 남자, 내가 기다릴까 봐 먼저 와서 대기까지 하고 있다니, 너무 완벽해. 나는 S를 보고 활짝 웃었다.

"J, 어메이징, 뷰티풀. 오늘 네가 스타 같아."

S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나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지.. 나도 나름 꾸미면 괜찮은 여자야."

나는 어깨를 우쭐해하면서 S에게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우리는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S에게 한국에서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아버지, 훌레아 이글레시스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공연장의 소음 탓인지, S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 순간 갑자기 관객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테니스 요정 안나 쿠르니코바가 남자친구의 공연장에 깜짝 등장해 손을 흔들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화려한 조명과 백댄서들의 현란한 춤이 이어지며, 콘서트의 열기가 본격적으로 타올랐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는 댄스풍 히트곡을 몇 곡 연달아 열창했다. 관객들은 모두 일어나 함께 춤을 추고 열광했다. 나 또한 그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S는 입을 다문채 앉아만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발라드풍의 노래가 흘렀다. 갑자기 S가 흐느끼지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댄스 가수 공연장에 와서 울고 있는 남자라니.... 나는 급히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S에게 주었다. S는 손수건을 펼치더니 거기에 얼굴 전체를 묻고 두 곡 정도가 끝나갈 때 가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더니 화장실에 간다면서 자리를 떴다. S가 돌아온 것은 콘서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앤리케 이글라시아스가 앙코르 곡을 부르기 전이었다.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그의 얼굴 전체가 벌에 쏘인 처럼 부어 있었다. 돌아온 그의 어깨를 감싸면서 괜찮냐고 물었다. S는 연속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마지막 곡을 부르겠다는 엔리케 이글레시아시의 맨트가 끝나자 S는 공연장을 나가자고 했다. 열기를 불태우는 가수와 열광하는 관객들을 뒤로하고 S와 나는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S는 말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동행헀던 나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뻘쭘하게 나도 그를 따라 걸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 묻고 싶은 충동이 입술까지 차 올랐지만 그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을 걷다가 S는 펍(Pub-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바(Bar) 가장자리에 앉은 S 옆으로 다가갔지만 앉아야 할지 아니면 집에 간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잠시 나와 술 한 잔 할 수 있어? 넌 잘 못 마시니까 약한 걸로 해"

S가 침묵을 깼다. 그리고는 Noble Lane 위스키와, B-52를 바덴더에게 주문했다.

"J, 넌 좋은 사람이야. 이런 상황에서 욕도 하지 않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펍안의 시끄러운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술 때문인지 S의 목소리는 격앙되었고 고함치듯 말했다. 평소 낮은 톤으로 말하던 그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나 차였어. 내 보이프랜드가 날 버렸어. 지난 3년간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가 원하는 건 모든 걸 줬어. 이 콘서트도 그가 원해서 아주 비싼 VIP 티켓을 내가 샀어. 날 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았나 봐."

위스키 몇 모금을 마신 S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나는 그가 하는 말과 지속되는 F-words를 듣고만 있었다. 아니 술이 취했어도 그렇지, 여자친구를 왜 보이프랜드라고 하는 거야, 그의 말실수가 은근히 거슬렸다. 내가 주었던 손수건은 어디다 두었는지 그는 냅킨을 여러 장 겹쳐 흐르는 눈물을 닦다가 코도 풀었다. 펍안의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다. 울고 있는 남자 옆의 조용한 여자. 이건 대체 무슨 장면일까, 사람들도 궁금했을 것이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술에 만취한 S를 내 어깨에 질질 끌다시피 그의 아파트까지 데려갔다. 그는 시드니 시내 중앙에 있는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몇호인지를 묻고 열쇠를 찾으려 그의 가방을 뒤적이며 문 앞에 도착한 순간, 그는 모든 걸 쏟아냈다. 역겨운 토사물이 폭죽처럼 터져 나와 복도 바닥과 출입문, 그리고 내 옷, 신발 위에 튀어 흩어졌다. 그를 소파에 떨구어 놓고 토사물을 치웠다. 지저분해진 내 옷과 신발도 대충 물로 씻었다. 역겨운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시드니의 야경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S의 아파트 이곳저곳, 벽마다 그를 버리고 떠난 애인과의 사진이 가득 걸려 있었다. 사진 속의 S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체격 좋은 남자의 품에 안겨 있거나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깨달았다. 아, S는 내가 생각했던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 구나. 그동안 내가 얼마나 둔감하고 어리석었는지, 왜 그렇게 눈치 하나 채 못 챘는지,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마치 어둠 속에 있던 진실이 한순간 불빛에 드러난 듯, 그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S의 아파트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이힐에 벗겨진 발뒤꿈치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그 통증이 문득 서울의 기억을 불러왔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콘서트가 끝난 뒤, 이루지 못한 사랑에 절망한 한 남자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던 그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사랑을 잃어 슬퍼하는 남자와 훌리오의 아들인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의 콘서트를 보다니… 완전 데자뷔였다. 전생에 내가 이글레시아스 집안과 원수라도 졌던 것일까, 하고 나는 어이없게 중얼거렸다. 아들과 아버지의 콘서트를 공짜로 구경했지만, 그 공짜가 준 달콤함보다 씁쓸한 기억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의 BGM


https://www.youtube.com/watch?v=9mQJaXwGPlg


https://www.youtube.com/watch?v=koJlIGDIm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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