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풋사랑은 높게 솟구쳤다. 그 검은 바다의 파도처럼.
스물한 살의 나는 어둡고, 존재감조차 미미했다. 동기들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들처럼, 뜨거운 청춘을 불태우며 밤마다 술잔을 부딪치고 과모임과 동아리 모임을 핑계 삼아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다. 나는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아르바이트를 하러 뛰어다녀야만 했다. 강의가 없는 날이나 주말에는 자정까지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며 하루를 소모했다. 그래서였을까. 동기들 역시 나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내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저 영혼이 빠져나간 듯 커다란 눈에 빼빼 마른 몸을 간신히 움직이는 피조물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젊음이 부러웠다. 그들의 자유가, 그들의 유희가 탐이 났다. 그래서 하루빨리 시간이 흘러가길 바랐다. 그것이 그 시절의 고됨을 버텨내게 해주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원이를 만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일하던 동갑내기였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을까. 그는 마치 내가 그 시간 그 길을 지날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불쑥 나타났다. 짧게 자른 머리, 오른손에는 반쯤 타들어가는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었다.
“알바 그만두더니, 밤마다 놀러 다니는구나.”
나는 그의 짧은 머리를 흘깃 바라보다가, 무심히 웃었다.
" 몇 달 있으면 군대 가는데 일만 하고 있기엔 내 청춘이 아깝지."
그는 이런 만남도 운명일지 모른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우리는 대전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전역 2층에는 여행자들과 밤을 잊은 사람들의 안식처 같은 넓은 커피숍이 있었다. 네온빛과 기적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띄엄띄엄 대화를 했다. 사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공통의 화제를 찾아 대화를 이어가는 게 쉽지는 않았다.
"조조할인 가봤어?"
원이가 내게 물었다.
"아니. 아르바이트에 치이다 보니, 시간 나면 잠을 좀 자려고 해."
"영화 보는 건 좋아해?"
"글쎄..., 나 고3 때 야자(야간자습) 제치고 더티댄싱(Dirty Dancing) 보러 갔다가 단속선생한테 걸렸어. 일주일 내내 전교생이 드나드는 현관문 앞에서 아침마다 반성문 쓰면서 얼마나 챙피를 당했는지. 그 뒤로는 영화관 근처에도 안 갔어."
별로 웃긴 이야기도 아닌데, 원이는 배를 잡고 박장대소했다.
"사실 그때 그 영화가 찐한 애정물인 줄 알고 보러 갔지. 제목부터가 아주 야하잖아. 그런데 영화 내내 야한 장면은 하나도 없었어. 반성문을 쓰는데 학생주임이 앞으로는 절대 이런 야한 성인 영화를 보지 않겠다는 말을 꼭 쓰라고 하는 거야. 그 선생 말이야, 영화를 좀 보고 말하던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성인물 어쩌고 저쩌고.... 야한 것을 봤으면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원이는 또 깔깔대며 웃었다. 짧은 머리에 환하게 웃는 모습이 순간 귀엽게 보였다.
"나 군대 갈 때까지 시간 날 때마다 조조할인 보러 갈래?"
갑자기 뭔 꿍꿍인가 싶어 대답은 하지 않고 원이를 바라만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유효기간이 있는 제안이네. 대신 영화는 내가 골라도 되지?"
원이와 나의 첫 조조할인 관람은 '피아노( The Piano)'였다. 영화 포스터가 내 맘에 쏙 들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바닷가에서 긴 머리를 날리면서 나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백마를 탄 멋진 남자가 나타나 피아노를 치는 내 주변을 마치 수호라도 하는 듯이 빙빙 돌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파도는 높고 낮음을 반복하면서 피아노 치는 내 발을 간지럽혔다. 아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나는 아름다운 바닷가의 풍경과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건반을 두드렸다.
그렇다. 이건 영화의 장면이 아니라 내가 꾼 꿈이었다. 주인공 아다(Ada)의 내레이션이 시작될 즈음, 나는 영화 초입에서부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눈을 뜨니 영화는 이미 끝나 있었고, 입가엔 흘린 침이 촉촉이 번져 있었다. 달콤한 잠이었다. 잠결에 들은 영화 속 풍경이 어렴풋이 내 꿈에서 재현 됐나 보았다. 침을 닦으면서 눈을 뜬 나를 원이가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잘 잤어? 너 정말 피곤했나 보구나. 코도 골았어".
그는 내가 깨지 않도록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고 했다. 그의 재킷이 어깨에 덮여 있었다. 그것을 돌려주면서도 무안함과 미안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그 여자가 아끼는 물건도 지켜준다는 내용의 영화였어. 음악도 멋있는 영화니까 나중에 꼭 다시 봐."
원이는 화도 내지 않고 짧게 영화의 줄거리를 전해주었다. 그 뒤로 몇 달 동안 우리는 몇 편의 조조할인을 함께 보았다. 그 시간들은 아르바이트에 찌든 나의 유일한 낙이자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원이는 입대를 했다. 군대에 간 원이가 많은 편지를 보내왔다. 나도 원이에게 편지를 썼다. 텅 빈 대학 도서관엔 지성은 사라지고 낙엽만 날리고 있다고 쓴 적도 있고, 조조할인을 가끔 혼자서도 보러 간다는 편지도 쓴 걸로 기억한다. 대전 역 2층 커피숍, 우리가 함께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짧게 엽서를 쓴 적도 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갔고 원이는 대전에 있는 학교로 복학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을 떠나왔다. 떠나오기 전, 원이에게 긴 편지를 썼다. 함께 떠나자고 썼던가.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내 머릿속엔 걱정과 쓸데없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있나 봐. 온전하게 너만을 생각해 주고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썼다.
<피아노>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것은 호주에 와서였다. 영어 수업 시간에 호주와 뉴질랜드 감독들의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그때 <피아노>가 상영되었다. 나는 수업이 끝난 뒤에도 연이어 세 번인가 더 영화를 찾아보았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어서였다. 여주인공이 피아노를 치던 그 바다의 독특한 색감이 인상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막연하게 그 바다에 가보고 싶어졌다. 한 여인의 서사를 품은 주제곡, “The Promise”의 리듬도 머릿속을 지속적으로 맴돌았다.
2008년, 회사 일 때문에 처음 오클랜드(Auckland)를 방문했다. 뉴질랜드 출장이 잡히고 나서 내내 영화 <피아노>의 배경지를 꼭 다녀오겠노라고 벼르듯 계획했다. 비지니스 업무를 마치고 짬을 내 그곳을 찾아 나섰다. 좁고 굴곡진 산길을 지나 마침내 그 바닷가에 도착했다. 영화에서 본 검은 바다와 아련히 먼 곳을 응시하던 피아노 옆의 두 모녀 뒤에 서 있던 거대한 바위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포스터 속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어쩌다 스쳐 지나가기만 한 풋사랑, 원이의 얼굴도 겹쳐 생각이 났다. 검은 모래 위로 바람이 거세게 불고 파도는 높이 일렁였다. 그 바닷가 어디선가, 아다(Ada)의 피아노 연주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오늘의 BGM
뉴질랜드 북섬 오클랜드 서쪽에 있는 카레카레 비치(Karekare Beach)는 영화 The Piano의 상징적인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영화 The Piano에서 주인공 아다(Ada)가 피아노와 함께 바닷가에 도착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어서 ‘피아노 비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의 모래는 화산의 잔재로 까만 모래 비치로도 유명하다.
The Piano의 OST 중, "The Promise"는 영국의 음악가 Michael Nyman의 작곡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o9G9C6Kv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