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해방시켜라!
1996년 10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출국 한 달을 앞두고, 내가 다녔던 회사 동료들이 송별회를 해주겠다며 종로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약속한 카페에 조금 일찍 도착해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두 여자가 마주 앉아 있었는데, 그중 나의 맞은편 여자의 얼굴이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절세미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눈부신 미모였다. 입술에 바른 선명한 빨간 립스틱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같은 여자로서 그런 미모는 부러움이기도 했다. 나는 힐끗힐끗 그녀를 바라보다, 혹시 실례가 될까 싶어 시선을 거두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카페의 스피커에서 그 시절에 내가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기타의 선율과 함께 저음으로 시작되는 남자 가수의 첫 소절이 흐르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가 불쑥 말했다.
"노래하는 이 남자, XX가 진짜 클 거 같아. 어마어마하게 큰 남자의 목소리야."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는 ‘지읒’이 두 번 겹쳐 있었다. 그 단어를 추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 나의 당혹감을 짐작할 것이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속된 표현은 원초적이고 동시에 노골적이었다. 두 여자는 노래가 흐르는 내내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나는 점점 불쾌해지기까지 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이 금세 기괴한 괴물의 입처럼 보였다.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뽀얗고 고혹적이던 얼굴도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 카페를 나왔고, 아래층 출입문 앞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어디선가 그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그녀의 말이 어김없이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옭아맸다. 나는 그 노래를 더 이상 순수한 음악으로 들을 수 없었다. 한때 그렇게도 애청하던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저속한 말이 남긴 그림자 속에서 외설적인 잔향으로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의 호소력 짙은 노래를 그 자체로 음미할 수 없다.
아, 잔인한 여자의 입술이여, 나를 해방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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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BGM
90년대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Chris Isaack의 'Wicked Game'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qaRPOEuFj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