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그리고 기차여행

천국으로 띄우는 노래

by 빠빠리

청주 시내의 한복판, 성안길에는 오래된 시간의 숨결을 간직한 국보 ‘용두사지 철당간’이 서 있다. 그 바로 옆에는 '기차여행’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카페 입구에는 짧은 철로가 깔려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갈 때면 마치 실제로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 듯한 설렘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곤 했다.


'기차여행'에서 J를 만났다. 우리는 어느 산골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다. 고등학교를 청주로 진학하게 되면서부터 J를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J가 다니던 학교와 내가 다니던 학교의 거리감도 있었고 더군다나 J는 늘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단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우연히 서점에서 마주쳤고 또 한 번은 대입 발표가 나던 날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계절이 흘러 우리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 카페 ‘기차여행’에서 다시 재회했다.


너무 오랜만이었지만, 우리는 마치 어제 헤어진 친구처럼 어색함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호주엔 왜 가는 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
J는 테이블 위의 물 잔을 천천히 돌리며 물었다.

"사람들에겐 유학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너도 알잖아. 내 형편이 유학 갈 정도로 든든하지 않다는 거. 그냥… 도망가는 거야. 현실로부터.”

J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새로 나온 노래인가 봐. 화음이 참 좋아.”
“뭐야, 명문대 들어가려고 유행가 들을 시간도 없었던 거야? 이 노래 몇 년 전에 나온 노래야.”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손을 툭 쳤다.

"이거 벼락 맞은 대추 나무래. 너 주려고 샀어.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나 봐."

J는 손가락만 한 나무 조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거는 한국땅에서만 먹히는 거 아냐. 호주에 가면 서양 귀신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나무토막이 힘을 쓸런가 모르겠다."

나는 시니컬하게 웃었지만 J는 자못 진지했다.

"언제쯤 돌아올 거야?”

“모르겠어. 돌아오는 티켓은 사지 않았거든.”

우리들의 대화는 짧고 건조했다. 대화가 끊길 때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우리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우리는 같은 계절, 하루 차이로 태어났잖아. 별과 바람을 좋아하고, 그리고… 우리는 연인 같은 친구잖아. 난 너와 같이 자전거 타고 플라타너스가 길게 뻗은 시골길 달리던 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어. 꼭 돌아와. 너무 늦게 오지 말고. 네가 한국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세상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해는 것 같아."

나는 J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깍지 않은 푸른 수염이 구레나룻을 따라 자라 있었다. 그것이 마치 그가 견뎌온 고독의 자취처럼 보였다.



그랬지. 우리는 연인 같은 친구. 난 하루 먼저 태어난 너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 했지. 세상을 향한 너의 맑은 시선, 심지어 조용한 너의 성격까지도.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저만치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너를 나는 또 저만치서 바라보았어. 우리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그 플라타너스 길은 영원을 향해 뻗어 있는 것처럼 푸르렀지. 지붕 위에 앉아 휘파람을 불고 있던 너. 너의 집을 지나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나도 휘파람을 불고 싶어서 몇십 번이고 입을 모아 연습해 보았지. 마침내 휘파람을 불 수 있게 됐을 때,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휘파람을 불면 너는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면서 웃곤 했었어. 지금 생각해 보니 뭐든 너를 보고 따라 하고 싶었나 보다.


열다섯의 우리는 기차를 탔다. 도청에서 하는 중. 고등학생 기자 연수회가 열리던 날, 학교 대표로 뽑힌 너와 나는, 강단에 모여든 도청 소재지의 많은 학생들 틈에 끼어 있었지. 그날 우리는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이탈해 조치원역으로 갔어. 내가 큰 도시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너는 서울행 기차표를 끊었고 우리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기차여행을 했지. 처음으로 가 본 서울은 크고 화려했다. 우리가 남산타워에 올라갔을 때 너는 이 거대한 도시를 정복해 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날 우리는 아주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온 동네가 뒤 집힐 정도로 소란스러웠지. 그 무모한 하루가 내겐 인생의 첫 기차여행이자, 가장 빛났던 모험이었다.


입시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너를 만났다. 넌 이제 곧 서울로 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몇 년을 만나지 못했지. 가끔 네 학교에서 발행한 학보지가 편지 한 장 없이 내게 도착했다. 난 언제쯤인가 너를 혹시 마주칠 까 싶어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고 몇 번의 지하철 환승을 한 후에 너의 학교 앞을 하루 종일 헤맨 날도 있었지. 우연히 마주친다면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 끼를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런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네가 나를 찾아왔다. 고된 아르바이트로 몸에 무리가 왔던지 이틀 심하게 몸살을 앓고 학교에 갔을 때 과대표가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어제 서울에서 누가 찾아왔는데, 강의도 안 나오고 내가 어디 사는지,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없어서 연락을 하지 못했단다. 흰 봉투 위에는 단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 ‘J 다녀감’. 그 먼 길을 와서 남긴 단어가 고작 그것이라니. 나는 네가 많이 외로웠을 거라 직감했다. 대한민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학교에서 너는 젊음의 치기를 누리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무수하게 쏟아내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서 아무 말도 쓰지 않고 갔나 보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가 있는 도시에 약속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 우연이라도 만나면 그것을 필연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너와 나, 산골 마을을 떠나 고독한 도시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의 청춘이 지나는 모든 길목에 플라타너스가 푸르게 푸르게 긴 가지들을 하늘로 쏘아 올리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도 서울로 향했다. 그 도시에 가면 생동감 있고 더 용기 있게 세상과 부딪히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그곳에서라면 조금은 더 단단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낯선 도시의 불빛은 냉혹했고, 너와의 재회는 끝내 엇갈렸다. 낯선 도시에서 우리의 젊음은 누구보다도 치열했지만 그 이면에서 꼬여가는 쓸쓸한 영혼의 똬리를 우리는 풀어내지 못했다.



J는 식어버린 커피를 아주 조금씩 홀짝거렸다. 내가 커피 한잔을 더 시키자고 하자, J는 조금 전에 틀었던 가요 두곡을 한 번 더 틀어줄 수 있겠냐고 대신 부탁하라고 했다. 나는 커피를 내리고 있는 바리스타에게 다가가 J의 리퀘스트를 부탁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음악이 다시 흘렀다.

"세상은 텅 비지 않았어. 내가 아는 너는 너무 순수해. 너무 움츠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 멋진 여자도 만나보고, 엠티도 가보고. 도서관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친구로서 하는 충고인데 넌 책에서 좀 멀어져야지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어."

나는 J가 준 벼락 맞은 대추나무토막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그래. 네가 나를 잘 알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J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말했다.

"내가 뭐 죽으러 가냐? 너, 우리가 서울 처음 봤을 때 기억나니? 난 그때 심장이 무지하게 뛰었었다. 대도시가 품은 가능성이라고도 할까, 뭐든 이루고 싶으면 다 되는 줄 알았어. 그런데 난 서울이 싫어졌어. 서울에 올라와서 겨우 2년 만에 이런 반감이 생긴 걸 보면, 지금은 여기를 탈출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고 해서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는 건 아니야. 떠난 자리에서 또 그 자리가 그리워지면 다시 돌아오는 거지.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

J가 다시 듣고 싶어 했던 노래가 막 끝나갈 무렵, 우리는 기차여행을 빠져나왔다.




J가 죽었다. 결혼을 앞둔 고향 친구로부터 J의 부고를 들었다.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아주 긴 유서를 남겨두고. 마지막 '기차여행'에서 J의 말이 떠 올랐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J의 얼굴이 식은 커피잔의 흔들림처럼 내 기억 속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그날이 마지막이 될 거란 걸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J처럼 우리의 운명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기차여행'을 나와 헤어지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 내 이름을 부르던 J를 나는 왜 다정하게 안아주지도 않고 보냈던가. 스물일곱의 J가 내 안에서 숨 쉰다. 내 유년의 즐거움, 동반자, 나의 솔메이트, 나의 고독한 J. 우리는 천국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곳에도 플라타너스가 푸르게 뻗어 있다면 좋겠다.


오늘의 BGM


J가 그리울 때마다 나는 이 노래들을 듣는다. '기차여행', 그 카페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소리새 "그대 그리고 나", 이은하 "청춘".


https://www.youtube.com/watch?v=oxkm4xw4swA


https://www.youtube.com/watch?v=Q-Fm1Qw2C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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