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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a Oct 05. 2018

제주에서 진짜 태풍을 만나다

그동안의 태풍은 '비바람'이었다

태풍 '콩레이'가 제주를 향 해 오고 있다. 지난여름 태풍 '솔릭'을 겪은 게 몇 주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가을 태풍이 또 오고 있다. 제주는 어제부터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회사에서는 퇴근 셔틀을 앞 당겨 운행한다고 오전부터 안내가 나오고 있다.


제주에 와서야 태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체감을 하게 됐다. 자연 앞에 인간이 한낱 먼지 같은 존재라는 걸 경험했다면 너무 과장된 생각일까.


제주에 이주한 지 서너 달이 지났을 때 태풍 '차바'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살아오면서 태풍은 매년 겪었지만 개인적으로 큰 피해를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이번에도 오는구나 싶었다.


태풍에 무덤덤한 나에게 팀원들은 '준비 잘하라'는 당부의 말을 계속 건넸다. 문 잠그는 것 외에 뭐 다를 게 있나 싶었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집에 와 창문이 잘 닫혔는지 정도만 확인했다.


'차바'는 새벽 2-3시 무렵에 제주도 남쪽으로 와 동쪽으로 지나가는 코스였다. 하루 종일 비가 엄청 왔고 밤 9시쯤이 되자 비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밖을 내다보니 도로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이런 날 밖에 돌아다니다가는 낙하물에 맞아 다칠 게 분명한 날씨였다.


가로등과 교통 표지판이 세차게 흔들렸다. 저러다가 뽑혀 나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비가 점이 아니라 면으로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막 쏟아졌다. 아니 퍼부었다는 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겪은 태풍은 태풍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2년 전 태풍 차바의 소리

2년 전에 찍어둔 영상이다. 어두워서 화면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베란다 넘어 쏟아지는 비와 흔들리는 가로등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워둔 스쿠터가 걱정돼 1층으로 내려갔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가는 바람에 휩쓸릴 것 같아서 나가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집에 올라갈 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내 스쿠터 옆에 아주 값비싼 외제차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 때문에 저 스쿠터가 넘어가면 그 외제차에 어마어마한 상해를 입힐 것 같았다. 그게 너무 걱정됐지만 나가보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힘을내줘 오도방아!'를 속으로 외치며 한 1시간쯤 떨다가 집으로 올라온 것 같다.


밤새 한 숨도 잠들지 못했다. 새벽 3시쯤이 되니 지붕이 뜯겨 나갈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옷을 입고 가방을 옆에 두었다. 여차하면 밖으로 뛰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밖으로 나가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는데.. 무튼 그때는 그랬다.


새벽 3시에 회사 단톡방에 다들 무사하시냐 톡을 보냈더니 다행히 숫자가 지워진다. 다들 안 자고 있던 모양.. 각자 동네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어느 동네는 전기가 나갔다고 했다. 다들 무서워했지만 그래도 다음 날 회사 안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들뜨기도 했다. 회사원들이란..


오전 8시가 되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날이 개고 있었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에이, 출근이네..'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회사원이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가봤다.


집 앞에 뽑혀 있는 배롱나무
스티로폼을 모아두는 이동장이 엎어져 있다. 주변은 온통 날아온 쓰레기 투성이..
신호등이 누워있다.
회사 텃밭도 엉망, 키가 작은 아이들은 그나마 좀 괜찮다.

다행히 스쿠터는 제 자리에 잘 있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며 도로를 보니 길은 온통 쓰레기 천지였다. 바람에 날아온 온갖 쓰레기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나무는 뽑혀 있었고 신호등은 누워 있었다. 신호등이 인도에 누워 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생경했다. 한 번도 신호등을 내려다본 적이 없었는데.. 위에서 올려다보던 신호등보다 왠지 좀 큰 것 같았다.


회사를 가보니 다들 무용담을 펼치고 있었다. 주택에 사는 사람은 문짝이 날아가 임시방편으로 처치했고 전기가 끊겨 물이 나오지 않아 회사 와서 씻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가로등이나 교통 표지판이 휜 것은 예삿일이었다.


태풍을 겪고 인스타그램에 신호등 사진과 함께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태풍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태풍에 대한 회고를 남긴다. 한마디로 '무섭지만 굉장했다'. 그동안 육지에서 겪은 태풍은 태풍이 아니라 비바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맹렬했다. 뭔 일이 날까 싶어 겉옷을 챙겨 입고 누워있었을 정도. 사실 좀 더 전전긍긍했던 이유는 내 오도방이 쓰러져 옆집 포르쉐에게 해를 끼칠까..


이렇게 태풍이 어마무시하다는 걸 직접 겪고 나니 그 이후로는 태풍이 온다는 예보를 들으면 준비를 하게 된다. 하루 이틀 나가지 못할 것을 생각해서 식료품도 사 두고 집 외부에 물건이 있다면 치워두거나 비가 샐 곳이 없는지 단속을 하게 됐다.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차하면 날아가거나 낙하물에 다칠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



얼마 전에 지나간 태풍 '솔릭'의 초반 모습이다. 아직 제주가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의 위력이었다. '솔릭'은 예보에 비해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후기들이 있었다. 시속 4km 의 느림보 태풍이었지만 엄청난 위력으로 제주도와 남해에 오래 머물다 갔기 때문에 제주를 비롯한 남해 내륙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한라산을 비롯한 육지와의 마찰로 태풍이 약해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한라산이 우릴 지켜줬어!' 하는 생각도 잠시 했더랬다.


태풍 전후로는 석양이 이렇게나 아름답다. 제주에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제주는 5일 오늘 밤이 고비다. 얼마나 세찬 비와 바람이 불지 상상도 안된다. 제주에 와서야 자연재해는 늘 대비해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솔릭' 때 너무 설레발을 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설레발'이 낫다. 이번 태풍도 인명사고나 재산 피해 없이 무사히 지나가면 좋겠다.




ps. 제주에서 태풍을 겪은 다른 분의 브런치도 덧붙여 본다. 제목이 너무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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