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12일 차 (상)
대단한 밤을 보냈다.
태풍 차바chaba가 제주를 관통했다.
아이한테 TV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나 역시 미디어와 단절된 생활을 하다 보니, 남편을 통해서 태풍 온다는 말만 듣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내 생애 경험한 태풍 중 단연 최고였다.
물론 내 기억 속에도 볼라벤, 나리 등 엄청난 위력의 태풍이 있었지만, 내가 '몸소 경험한' 최고의 태풍으로, 나는 제주에서의 생활 중 단연 최고로 뽑을 밤을 보냈다.
무언가 육중한 것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옆집 백구가 엄청 짖어댔다. 눈을 떠보니 새벽 3시 정도였던 것 같다. 눈을 떴다감았다를 반복하며 무슨 소리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구를 만한 무거운 것이라면 현관문을 받쳐놓는 통나무 밖에 없었다. 그걸 쓰러뜨리고 굴릴만한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는가 싶어 블라인드 사이로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키 큰 야자수는 오히려 건재하다. 그 보다 작은 나무들이 거의 가로로 누워있다. 비도 비지만 바람이 정말 엄청났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삐리릭 전자음 소리가 났다. 현관문이 열린 건가 싶어 눈을 떴다. 태풍을 틈타 강도라도 왔을까 싶어 도저히 다시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현관을 밀어보니 문을 연 흔적이 없다.
의심이 가는 건, 가끔 천둥에 의해 전자제품이 저절로 작동하는 사례가 있는 걸로 미루어 그게 아닐까 했다.
다시 잠을 청했다.
이번에는 갑자기 밝아졌다. 거실로 나와 보니 스탠드 등이 저절로 켜져 있다. 거센 바람 때문에 전선이 심히 흔들려 전기적인 원인으로 등이 켜졌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한밤중에 켜진 등은 아무래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다시 누웠다. 또다시 삐리릭 소리가 난다. 이번엔 자는 방 에어컨이다. 또 이어 멀리서 삐리릭. 작은 방 에어컨이다. 플러그를 모두 뺀 후에야 마음을 놓아 본다. TV아답터나 공유기 등이 아직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 걸로 보아 집 안의 전기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아침이 되어서 단전 단수 상태라는 메시지를 받기 전까지는.
아무튼 다시 잠이 들기를 바라고는 자리에 누웠다.
또다시 육중한 무언가가 구른다. 그러더니 이번엔 엄청난 파열음 소리를 내면서 무언가 떨어졌다.
새벽 4시였다. 옆집 백구가 미친 듯이 짖어댔다. 귀가 예민한 동물인 데다 수태 중이니 얼마나 놀랬을까. 내 가슴이 정신없이 뛰었다. 다행히 그 후로 큰 소리는 잦아들었던 것 같다.
그리곤 잠이 들었다.
7시쯤 아이가 먼저 깨서 나를 깨운다.
눈도 못 뜨는 나에게 “엄마, 눈을 떠요. 크게 떠요.”하더니 씨익 웃어 보인다. 며칠 전부터 하는 행동이다. 이렇게 웃으면 내가 온 얼굴에 뽀뽀세례를 해주었더니 엄마가 좋아하는 걸 알고 아침마다 이런다. 아이 얼굴에 내 입술을 부비며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곤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도 몇 번을 하더니 엄마가 졸린 걸 알았는지 조용해진다. 다행히 다시 잠이 든 것이다. 마음 놓고 자려는데 이번엔 전화벨이 울린다.
친정아빠였다. 밤새 태풍의 피해 소식이 모든 TV 채널을 장식한 모양이다. 아이도 간신히 잠들고 나도 너무 졸려서 그냥 전화기를 벨소리만 줄이고 다시 잠을 청했다.
조금 있다가는 쥔장님의 메시지가 왔다. 밤새 안녕했냐고, 단전에 단수까지 되었다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번엔 남편의 전화다. 역시 벨소리만 줄여놓고 잠을 청했다.
너무 졸려서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서 결국 일어났다. 계속되는 각성에 다시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밖의 상황도 궁금해서 현관을 열고 나왔다.
밖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다.
비는 거의 그치고, 바람도 매일 아침에 부는 정도이다. 그저 마당에 어디선가 날아 들어온 쓰레기들과 강풍에 찢긴 나뭇잎들과 나무껍질들이 어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을 받치는 나무기둥은 의외로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도대체 어제 굴러다니던 육중한 물건은 뭐였을까.
주방 쪽으로 돌아가니 낯선 물체 하나가 떡하니 누워있었다. 가로세로 길이 3미터에 두께가 10센티는 족히 되는 철제로 된 물체였다. 그 위로 산산조각 난 두꺼운 유리. 바로 태양열 집열판이었던 것이다. 이런 게 여기에 세워져 있었는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간밤의 파열음은 이것이 넘어진 소리였구나.
2층을 올려다보니 창문 2짝이 없어졌다. 2층은 더 난리가 났겠구나 싶어서 쥔장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발밑을 보니, 10여 센티 정도 되는, 생긴 건 황토색 뱀인데 혀를 날름거리지는 않고, 자세히 보니 더듬이가 2개 붙어있는 생물이 기어가고 있다. 이게 바로 윗집 딸아이가 질색했다던 민달팽이인가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하하하. 엄청났죠?”라는 말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괜찮았어요? 정말 엄청난 경험 하셨네요.”
“그러게요. 밤새 정말 놀랬어요. 창문이나 현관문이 덜컹거리지 않아서 망정이지, 울 뻔했네요. 그나저나 밤새 엄청 큰 소리 나더니 태양열판이 넘어져 깨졌네요?”
“하하하. 그러게요. 어제 남편이 옥상에 올라가서 보고는 위태위태하다 했는데 저리 됐대요.”
“네? 그럼 옥상에서 날아간 거예요?”
“네. 하하하.”
진상은 과연 그랬던 것이다.
장정 2명이 들어도 번쩍 못 들고, 겨우 바닥에 끌고 올라갈 정도의 무게가 강풍에 날아가 옥상에서 우리집 주방 앞쪽 대나무숲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나마 그 정도의 소리로 끝났던 것이 대나무가 쿠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반대방향으로 날아갔으면 우리 차도 박살이 났을지도 모른다.
우리 둘은 여러모로 다행이라며 웃지 못할 이 상황을 놓고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다행히 2층 창문은 미리 떼어놓은 것이라 했다.
조금 후에 대문 앞으로 마을 주민 한 분이 오셨다. 애들 학교 보냈냐며 자기 집은 돌담이 무너졌다 했다. 이윽고 또 아기 업은 할머니 한 분이 오시더니 당신 집은 장독이 날아갔다 했다. 밭 위로 날아온 큰 대야, 일명 다라이를 치우러 오신 할머니도 있다.
이 상황도 너무 웃겼다.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라는 듯 각자의 피해상황에 대해 자랑하듯 알리는 상황에 나도 쥔장님도 너무 웃겼던 것이다.
“웃기죠? 이게 일상이에요. 하하하.”
대자연의 힘 앞에서 울상 지어 무엇하랴.
그저 놀라운 상황에 나온 헛웃음이 어느새 진짜 웃음이 되어 있었다.
“저, 어제 제주 에세이 읽다가 볼라벤 얘기 나와서 엄청 놀랐는데 이번에도 만만치 않은가 봐요.”
“어휴, 볼라벤은 더 했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모두가 돌아가고 우리는 눈을 맞추며 또 웃었다. 어이가 없으니 그저 웃음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저는 사실 어제 바람이 하도 불어서 귤 다 날아갔겠다 싶었어요. 그 와중에. 어제 특별한 일정도 없었는데 '귤이나 따서 청이나 담글걸' 하고 생각한 거 있죠. 하하. 근데 귤들은 멀쩡하네요.”
“어머, 나랑 똑같다. 나도 아침에 나와서 ‘여보 감들이 다 떨어졌어’라고 했다가 지금 그게 문제냐며 우리 아저씨가 핀잔줬는데. 철없는 여자라고. 하하하하.”
이렇게 우리는 등을 때려가며 웃었다. 아이는 그때까지 곤히 자주었다. 소리에 예민한 우리 아이가 어찌 그 밤에 아무렇지 않은 듯 잘 자고, 아침나절까지 또 깊이 자다니. 빗소리와 바람소리가 아이에게 자장가 역할을 해주었을까.
그때서야 아침에 걸려 온 전화 생각이 났다. 친정과 남편에게 전화를 하면서 나는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들은 다행이라면서도 나의 반응에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그래도 남편은 건강하게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그나저나 단전이라면 냉장고의 음식물들이 걱정이다. 남편과 쥔장님은 일단은 냉동실에 넣어두면 냉매 역할을 해서 좀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야채를 제외하고는 냉장실의 거의 모든 음식물들을 냉동실로 옮겼다. 두부, 맛살, 단무지, 우유, 쌀음료, 빻은 마늘, 빵 등등.
그리고 당장의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고구마와 우유를 내어 아이에게 주었다. 그러고 나니 혹시 가스는 정상가동되나 싶어 켜봤더니 불이 들어왔다. 그래서 어제 만들어둔 미역국에 꺼진 밥통 속의 찬밥을 말아 아이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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