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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Aug 23. 2017

오늘도 특별한 하루였습니다.

17.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11일 차




오늘은 새별오름을 갔다가, 성이시돌목장에 들러 말을 보여주고 우유부단이라는 카페에서 우유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돌아오려는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날도 화창하고 기분 좋게 나설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이가 잠든 시간을 이용해 검색해 보았다. 여러 가지 루트를 고려한 결과 이게 최선이다. 


간단하게 허기만 면하고, 새별오름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오름을 올라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윗집 이모가 다겸이를 부른다. 그 사이 일어난 겸이가 반가운지 얼른 현관을 나가 이모를 맞이한다. 


오늘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하니 오늘 날이 더울 것 같다한다. 괜히 오름에 갔다가 어제처럼 땀만 뻘뻘 흘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 계속 고민을 했다. 





맨 몸에 기저귀만 차고 나온 겸이는 바람이 좋은지 잔디밭을 폴짝거리며 뛴다. 


그 모습을 본 이모가 날도 좋은데 옥상에 올라가서 바다를 보자고 제안했다. 고작 한 층 차이인데, 옥상에서 보는 풍경은 확연히 달랐다. 


집 자체가 고지가 높아서 인지 다른 지역을 살짝 내려다볼 수 있었다. 멀리 애월 바다도 보였다. 무엇보다 바람이 좋다. 차지 않고 덥지 않은 딱 기분 좋은 바람. 그 바람을 맨 몸으로 맞는 아이는 촉감이 꽤나 좋았나 보다. 두 팔을 벌리고 뱅글뱅글 돌며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녀석. 뭘 좀 아는데? 


이모는 제주바람과 모기 무서운 줄 모르고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아이도 대단하고, 그걸 그냥 두는 엄마도 대단하다 했다. 


이런 거 해보려고 여기에 온 거니까. 


아파트 단지 내에서 맨몸에 기저귀 바람으로 나오면 아마 다들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다. 쉽지 않은 기회를 아이와 나는 충분히 누렸다. 바람 많지 않은 날 밤에 돗자리 깔고 누워서 별 보는 것도 너무 좋다 하기에, 날 좋은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옥상을 내려와서 채비를 하는데 시간도 지체되고 자꾸 고민이 되는 거다. 무엇보다 아까 날씨와 다르게 흐리고 바람도 많이 분다. 곧 낮잠 잘 시간이라 시간도 애매하다. 




아이에게 산에 갈까 유모차 타고 산책 갈까 물었더니 산책을 가자한다.

그래. 오늘은 쉬면서 동네 산책이나 해보자꾸나. 



유모차에 태워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작은 언덕에서 말이 풀을 먹고 있다. 동네 안에서도 말을 볼 수 있다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점차 더 거세지고 있었다. 유모차를 돌려 집 쪽으로 오는데 친정엄마의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를 하는 사이, 아이는 잠들어버렸다. 





대문 앞까지 와서 잠시 고민했다. 

아이를 차에 실어서 커피숍에 가서 책을 읽을까 아니면 집에 들어가서 편히 재우고 나도 눈 좀 붙일까. 카시트에 옮겨 태우고 다시 차에서 내리는 동안 아이가 깨면 낭패다. 결론은 후자였다. 방에 아이를 뉘이고 곁에서 책을 읽었다. 



효리누나, 혼저옵서예. 


제주에 오기 직접에 구입한 것인데, 제주에 사는 청년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엮은 책이다. 블로그에서 이 책을 읽으며 애월읍내를 돌아다니면 큭큭 웃음이 난다 하기에 사본 것이다. 진상 손님들 이야기부터 태풍 볼라벤의 엄청난 위력까지 성장소설 같은 풋풋함과 약간의 유치함이 조화된 책이었다. 읽다가 나도 아이 곁에서 잠들었다. 




3시가 좀 넘었을까. 

택배 아저씨의 노크소리에 잠이 깼다. 곧이어 아이도 잠에서 깨어났다. 식당 가서 먹으려고 아침을 너무 간단히 먹었다. 일단 우유를 한 잔 주고, 윗집 이모에게 받은 고구마를 쪄내 주었다. 


우리 아이는 고구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달콤한 음식이라 잘 먹을 줄 알았는데, 어렸을 적 간식으로 줘도 크게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관심을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사람'이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토실이가 감기에 걸려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러 나갈 수 없게 되자, 친구들은 토실이를 위해 눈사람을 만들어 왔다. 토라진 토실이를 위해 엄마는 고구마를 이용한 눈사람을 만든다는 이야기인데, 엄마의 대사 중 "고구마 엉덩이에 주사 놓을 사람!"이라는 말을 꽤나 좋아했다.


고구마 엉덩이에 주사 놓을 사람!




부침개를 부칠 요량으로 마당에 나갔다. 아까보다 바람도 세지고, 빗방울도 날리고 있었다. 부추를 자르고 있는데 윗집 아이들과 이모가 외출에서 돌아오더니 우리 마당으로 왔다. 옆 집 호박이 우리 담을 넘어 자라고 있는데 따 먹어도 된다고 했다며 뚝 따더니 부침개 거리에 넣으라고 주셨다. 



그리하여 호박, 양파, 당근, 부추를 넣은 야채 부침개를 부쳤다. 밀가루가 적어서인지 뒤집는데 자꾸 둘로 갈라졌다. 총 세 자박을 부쳤는데 마지막으로 부친 게 가장 모양이 그럴싸해서 그걸 가지고 윗 층으로 올라갔다. 


“이모! 부침개 가지고 왔어요! 이모!” 


며칠 전 불렀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아이는 더욱 자신 있게 이모를 불렀다. 얼마나 된다고 가져왔냐고 하기에 식구가 적어 세 자박 밖에 안 부쳐서 달랑 하나 가져왔다고 답하고는 내려왔다. 


배가 고파서인지 아니면 입맛에 맞았는지, 아이는 잘 받아먹었다. 




아이가 먹는 동안 옥돔 미역국을 끓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리 어렵지 않아 보여서 시도한 것인데, 국 가운데 '미역국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내가 끓여도 웬만해서는 맛있게 끓여지는 것 같다. 



끓는 쌀 뜬 물에 옥돔을 넣어 육수를 우려낸 후 가시는 발라내고, 참기름에 볶은 미역을 넣어 끓이면 끝이다. 가시 바르는 일이 성가시기는 했지만, 굵은 뼈만 골라낸다는 생각으로 대강 해치웠다. 맛을 보니 식당에서 먹던 그 맛이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했더니 남편도 칭찬하며 부러워한다. 나중에 오면 한 번 끓여 주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후식으로는 '사연 있는 배'를 먹었다. 제주 온 첫날,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갔는데 아이가 배를 집어 달라하더니 토끼처럼 이빨로 갉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기 사게 된 배다. 계속 잊고 있다가 오늘 생각나서 깎았는데 의외로 맛이 좋았다. 




오늘 산책도 제대로 못했고, 저녁시간이 아이도 심심할 거 같아서 만들기를 하기로 했다. 지난번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돗자리부터 폈다. 그리고 각종 재활용품들과 콩, 쌀, 물감, 색종이, 가위, 풀 등을 가져와 돗자리 위에 깔았다. 


제일 먼저 만든 것은 롤화장지 심지로 만든 사람이다. 여기에 온 후 재활용품들 중에서 규모가 크지 않은 것들은 봉투에 따로 모아 두었는데, 그때 챙긴 화장지 심지가 주재료였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심지의 3분의 정도 지점을 비스듬하게 칼로 잘라 입의 위치를 먼저 만든 후, 까만 콩으로 눈을 붙이고, 색종이로 코와 혀를 붙이면 된다. 머리는 방금 먹은 배의 싸개를 잘라 붙였다. 입을 벌려 말을 하니 아이가 까르르 좋아하며 자기도 해본단다. 




그다음에 뭘 만들까 물었더니 ‘헬로카봇 시계’를 만들자고 했다. 시계를 만들 재료는 따로 없었고, 그냥 팔찌를 만들어 채워주면 시계라고 받아들일 것 같아, 빨대를 잘라 실로 꿰었다. 실 꿰기는 아이에게 맡겼는데 26개월 아이가 하기에는 조금 무리였지만, 조금씩 도와주니 금세 몇 개를 성공시켰다. 



이번에는 케이크 받침이 눈에 띄었다. 여기엔 뭔가 붙이는 게 좋겠다 싶어서, 아이에게 뭘 그릴까 물었더니 잠시의 고민도 없이 공룡이라고 답했다. 목공용 풀로 대강 공룡 모양을 만들어 그리고 거기에 쌀을 뿌렸다. 그리고 기울이면 풀이 있는 부분만 남고 남은 쌀은 차르르 떨어진다. 두세 번 반복하면 꼼꼼하게 채워져 붙는다. 



거기에 눈 부분은 또 까만콩을 붙이고, 몸통은 원하는 색깔의 물감을 칠하면 끝이다. 아직 다겸이 정도의 아이는 칸에 맞춰 색칠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그냥 붓을 종이에 대고 휘두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색깔의 균형은 당연히 알 리 없다. 이 색 저 색 마구잡이로 찍어 바르기에, 엄마는 이 색깔 해 볼게 말하며 톡톡톡 찍으니 힘 조절 안 되는 아이도 따라 한다며 톡톡톡 찍다가 판에 붙은 쌀을 떨어뜨린다. 완벽을 원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재미만 느낀다면 그걸로 되는 거다. 그런데 의외로 멋진 작품이 나왔다.



빈 색종이 비닐에 물감 묻은 붓을 넣고 문지른 다음 비닐을 누르면 물감이 퍼진다. 여러 색으로 그 작업을 하니 마치 멋진 유화를 그린 것 같은 작품도 나왔다. 



원숭이 그림에 색칠도 해 보았다. 하지만 물감은 몸에 묻혀야 제 맛인 아이는 발도장을 찍겠다고 했다. 붓으로 발바닥을 문지르니 깔깔깔 웃어대는 아이. 상상만 해도 엄마도 간지럽다. 그 발바닥 옆에 발바닥 모양으로 풀칠을 하고 조각낸 양면 색종이를 뿌렸더니 또 다른 알록달록 발바닥도 나온다. 




그렇게 10시가 됐다.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스토리가 있는 매일을 보내고 싶었는데, 어쩌면 오늘은 그 계획에서 틀어져버린 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어딘가를 가서 기록에 남겨야만,
의미 있고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주에 온 이유, 여기에서 아이를 양육해 보고 싶었던 이유. 

그것을 잘 생각하면 오늘도 분명 특별한 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오늘의 가계부}
지출 없음.



Today's meal

-조식: 카스테라 + 우유

-중식: 찐 고구마   

-석식: 옥돔 미역국 + 야채 부침개 +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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