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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Jul 31. 2017

둘 뿐이어도 외롭지 않다

16.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10일 차




오늘도 이른 기상이다. 


어젯밤 피곤했는지 아이를 재우다가 나도 같이 일찍 잠들어버렸다. 거실로 나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깨서는 문을 열고 나온다. 저도 푹 잤는지 배시시 웃는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이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도 내가 옆에 없으면 금방 잠을 깬다. 부모 자식 간에는 정기가 흐른다더니 정말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이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우리 둘 다 이른 시작이다. 어제 윗집 형이 빌려준 자석 블럭을 잠시 가지고 놀더니 밖에 나가자 한다. 


“엄마, 멍멍이가 잘 잤냐고 해요?”, 풀을 뜯어 나에게 건네며 “엄마, 먹어요.” 하며 아주 신이 났다. 



날이 맑은 데다 어제만큼 습도가 높지 않아서 바람도 참 좋다. 


“다겸아, 아침밥 밖에서 먹을까?”

“응. 밖에서 먹어요.”


얼른 들어가서 남편이 만들어둔 햄버거 스테이크를 두 개 구워서 내어갔다. 남편과 영상 통화하면서 이 모습을 보여주니 화사하고 단란한 모습이 너무 좋아 보인다며 기뻐했다. 


마당에서 먹는 아침밥


"엄마, 난나가 말고기 잘 먹으니까 기분이 좋아요?"

“응. 너무 좋아. 그런데 다겸아, 이건 말고기가 아니고, 꿀꿀 돼지랑 음머 소랑 같이 들어간 거야. 겸이가 밥을 정말 잘 먹어서 꿀꿀 돼지랑 음머 소랑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하길래 아빠가 그럼 둘 다 들어가라 했대.” 


사실 알고 보면 잔혹동화다. 동물들은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이며 놀잇감인데, 동시에 먹거리도 된다. 하지만, 아직 아이에게 그런 자비심이나 이런 감정은 없기 때문에 내 이야기가 흥미진진한가 보다.


“난나가 밥 잘 먹어서 꿀꿀 돼지랑 음머 소랑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 했는데, 아빠가 둘 다 들어가라 한 거야? 난나가 좋아서?


어쨌든 스스로 떠먹는다. 맘에 든다는 표시이다. 




이른 시작은 이른 출발을 하게 했다. 오늘은 협재해수욕장이다. 

집에서는 곽지과물 해수욕장이 더 가깝지만, 지난번 가 보았으니 오늘은 조금 더 거리가 있는 협재로 가기로 했다. 그래 봤자 집에서 20㎞ 정도 거리지만. 


평소보다 2시간 정도는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다에 올 작정으로 집에서부터 방수 기저귀에 래쉬가드까지 입혀서 왔다. 



짐이 많아서 유모차에 실고서는 모래사장을 지나가는데 바퀴가 모래에 잠겨 쉽지는 않았다. 아직 사람이 많지 않다. 


협재바다는 곽지과물과 또 다르다. 해변은 그렇게 길지 않은 것 같은데 물색이 더 옅고 맑다. 하얀 조개 파편들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 고스란히 보인다. 모래부터 깊은 바다 있는 곳까지의 색감이 그러데이션을 이룬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모래놀이 시작이다. 나는 연신 카메라에 바다와 아이를 담느라 바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아이보다 조금 큰 듯 한 여자아이와 엄마가 자전거를 끌고 왔다. 

그들은 다겸이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는데, 내가 먼저 그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애를 키우다 보면 아이의 월령을 묻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이제 월령을 따지지도 않는 개월인지 헷갈려하며 4살이라고 알려주었다. 엄마들이 이야기를 트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같이 놀게 된다. 겸이의 손길이 제 장난감에 향해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함께 노는 아이의 이름은 RAIN. 알고 보니 나와 같은 곳에 살다 큰 결심을 하고 제주로 이주를 왔다 한다.



여기서 잠깐. 제주에만 ‘이주’라는 표현을 쓴다고 굉장히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다. 부산이나 인천으로 가면 ‘이사’이고 왜 제주만 ‘이주’냐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제주특별자치도’라는 말부터 한 나라 안에서 특정 지역을 ‘특별히’ 여겨 나오는 말인 듯한데, 그것이 되려 ‘역차별’로 느껴지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는 간다. 


어쨌든 막상 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불편한 게 더 많다고 한다. 기본적인 장보기부터 가까운 곳에 마트가 없으니 한 번 장보는 것도 일이고, 남편이 차를 쓰고 있으면 차 없이 아이와 다닐 만한 수단도 도시처럼 편치 않다는 설명이다. 제주를 꿈꾸는 나에게 이런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다. 또 관광객들에게는 협재해수욕장이 유명하지만, 도민들에게는 금능 으뜸원해수욕장이 더 인기가 좋다는 것도 알려주셨다. 협재보다 더 예쁘다 하니 기대를 가져본다. 



슬슬 배가 고파왔다. 아이를 먹이다 보면 이내 지쳐 엄마는 입맛이 떨어져 몇 술 먹고는 헛배가 부른 경우가 많다. 오늘 아침도 그랬나 보다. 

오는 길에 봤던 ‘김창민씨네’는 맛집이기는 하나 역시 고깃집이라 하고, 1박 2일에 나와서 유명한 ‘만섬’은 예전에 먹어본 결과 서비스도 맛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RAIN맘과 헤어지는 길에 점심 먹을 만한 곳을 물어봤다. 근방에는 고깃집 말고 딱히 아이와 먹을 만한 곳이 없다며 몇 집만 알려 주고,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한 후 금능해변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때 쏠이맘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오늘은 해변 탐색을 한다기에 혹시나 싶어 전화를 걸었다. 금능해변에 나와 있는데 지금은 만조라서 저녁 때나 되어야 아이가 놀만 할 것 같다고 했다. 간조가 되면 바다 가운데 섬이 드러나면서 그곳까지 조개며, 소라게며 잡을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밥을 먹으려다 결국 다시 놀게 되었다. 그래도 바다에 왔는데 튜브는 타 봐야지 싶어서 물에 띄워주는데 무서워서 안 탄다고 한다. 물을 그리도 좋아하는 아이가 웬일일까 했는데, 엄마가 물에 같이 들어가서 타는 튜브가 아니라 망망대해에서 둥둥 떠 있는 튜브가 무서울 법도 할 것 같다. 대신 우리 튜브는 쏠이 할머니께서 쏠이를 태우고 수영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감사하게도 할머니는 겸이도 태워주셨다. 



그렇게 모래놀이와 바다수영을 마치고 우리는 다 같이 ‘협재국수가게’에서 점심을 먹었다. 고기국수, 성게국수, 보말죽 그리고 간식으로 토스트와 닭강정도 판다. 성게국수는 처음 보는 것이기에 엄마 둘은 국수로 할머니는 죽으로 주문했다. 원래는 보말칼국수를 드시고 싶어 했는데 메뉴에 없어 물어보니, 보말은 칼국수로 먹으면 맛이 없어서 메뉴에서 뺐다면서 원하면 해주시겠다는데 사양했다. 전에 제주에 왔을 때 보말칼국수로 유명한 집에서 먹어봤는데, 작은 가게지만 제주맘들 사이에 유명한 맛집으로, 나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주방장이 별로라면 그 집에서는 별로일 게 분명하다. 



성게국수는 성게 미역국에 국수를 만 것과 같은 모양새인데, 간간하기는 했지만 미역국보다 성게알도 많이 들어있고 깔끔했다. 보통의 보말죽은 보말을 갈아 짙은 초록색인데 여기는 보말을 통째로 넣어 씹는 맛을 살렸다. 흑돼지고기국수 6천 원, 돔베고기 1만 2천 원, 그리고 우리가 먹은 성게국수와 보말죽은 모두 1만 원. 



김치를 제외하곤 대부분 제주산이라는 표기도 있고, 과거 청산식당 시절 소녀시대 수영이 다녀가고 받은 싸인도 붙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연예인이 다녀갔다고 해서, 매스컴을 탔다고 해서, 블로그에 칭찬글이 많다고 해서 모두 ‘리얼’ 맛집은 아님을 안다.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며 맛집을 발굴해내는 일인데, 짧은 일정 상 망할 것을 각오하거나 그럴 용기가 없는 맘들은 ‘제주맘-제주도 행복한 부모 이야기’ 카페에 가입해서 정보를 얻는 것을 추천한다.



밥을 먹고 나서 건너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한라봉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할머니께서 집 근처에 전복을 양식하여 직판하는 곳이 있다면서, 아이랑 둘이 있으면 이런 음식 사 먹기도 쉽지 않을 텐데 같이 가서 먹자고 하셨다. 나도 쏠이맘도 나도 당황했다. 하지만, 우리는 화통하신 할머니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영어조합 한림바다목장’이라는 곳에서 3만 원어치의 전복을 사서, 쏠이네 집으로 갔다. 카페에서 봤었던 꽃분홍 칠을 한 집이다. 다른 곳이라면 촌스럽게 느껴질 핑크칠도 이곳 제주에서는 왜 이렇게 모두 이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마을회관, 카페, 도서관, 빌라, 농가주택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는 이 마을엔 돌담마다 곱게 칠한 소라껍데기가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쏠이맘 말로는 집 바로 옆에 있는 ‘금능 꿈차롱 작은 도서관’ 은 오후 4시에 개관해서 9시에 폐관한다고 한다. 아마 낮 시간에는 방문하는 아이들이 없어, 어린이집 하원과 아이들의 하교시간에 맞추어 여는 게 아닐까 싶다. 아이 낮잠시간과 겹치기도 하고, 막상 저녁에 가면 문화교실수업으로 시끄러워 도서관 이용이 어려웠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쏠이 할머니는 죽을 끓이려면 흰 쌀이 필요하다 하시며 나에게 잡곡에서 쌀 골라내기 미션을 주셨다. 손님이라고 상전 대접하는 게 아니라 이리 편하게 대해주시니 내 마음도 편안했다. 



두 아이는 곤히 자고 어른들만의 고요한 휴식시간이었다. 

전복은 1㎏에 5만 원인데, 3만 원어치만 사도 손바닥 만 한 전복이 8마리이다. 맛있게 손질된 전복회를 기름장에 찍어먹는데 비리지 않고 정말 맛깔났다. 



이윽고 완성된 전복죽은 아이들이 깨고 먹었는데, 겸이도 어른 대접 한 그릇을 뚝딱하고 먹어치웠다. 이 녀석. 엄마가 해 준 것만 잘 안 먹네. 아이들의 입맛은 가장 원초적이고 솔직하니 할 말은 없다. 


형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우연히 발견한 TV 리모콘. 쏠이가 그걸 보고 주인행세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눌러서 켰는데, 하필 EBS에서 애니메이션을 해주고 있다. 두 엄마는 한숨을 쉬고, 두 아이는 눈이 빠져라 집중해서 TV를 본다. 



제주 와서 처음으로 TV를 보는 겸이는 흥분이 극에 달했다. 엄마 혼자 집에 간다 해도 들은 척하지 않고 빠이빠이를 했다. 이윽고 쏠이맘에 의해서 TV는 꺼지고, 아이는 울고. 

하지만, 곧 발견한 스티커북에 또 빠져서 집에 안 간단다. 8시인데 칠흑같이 어둡다. 운전이 걱정되는 나는 억지로 아이를 안고 나왔다. 다행히 아이는 울지 않았고, 오는 내내 잠들지도 않았다. 





제주의 밤길은 때로는 가로등이 없는 도로도 많다. 그저 내 자동차의 불빛에 의존해서 달려야 하는데, 가끔 나타나는 차가 쌩하니 지나가면 덜컥 겁이 난다. 밤길 운전은 속도도 무섭다. 절반은 가로등 없는 도로를 오고 남은 절반은 가로등이 있는 대로로 왔다. 


어쨌든 아찔하게, 하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모래가 붙어 끈적해진 몸을 씻어내며, 아이에게 물감을 내주었다. 한여름의 해수욕도 아닌데 내 팔과 콧잔등이 붉게 타버렸다.




이렇게 제주에서의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Epilogue

쏠이맘이 만나자마자 아침에 산 고구마라며 봉지를 건넸다. 아이도 배가 고팠는지 날고구마를 깎아주니 맛있다며 먹었고, 쏠이맘은 아이에게 배고프냐며 우유도 하나 주었다. 나를 대신해 당신 손자도 아닌 우리 아이에게까지 튜브를 태워주시는 쏠이 할머니. 두 분에게 고마운 마음에 점심값은 내가 선수 쳐서 계산했다. 그랬더니, 이렇게 하면 어떻게 편히 만나겠냐며 오히려 불편해하신다.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싶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다. 뿐만 아니라 집에 오는데 겸이가 잘 먹는다며 말린 사과까지 챙겨주신다.
쏠이 할머니 말씀대로 이렇게 인연이 되어 집까지 와서 밥도 함께 먹으니 참 감사하다 하시는데, 나야말로 그러했다.
집에 도착했는데, 이번엔 쥔장님 내외와 마주쳤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인 듯 손에 든 꾸러미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어 겸이에게 건네주셨다. 

이렇듯 우리는 단 둘이라는 이유로 힘들고 외롭기도 하지만, 주변의 더 많은 도움과 관심을 받기도 한다. 아이와 둘이라고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닐까. 오늘 나의 잇따른 행운에 조심스러운 생각을 더해본다.

  {오늘의 가계부}
협재국수가게 3.1만 원(성게국수 1만 원 * 2 +보말죽 +공기밥) 



Today's meal

-조식: 햄버거스테이크 +계란후라이

-중식: 성게국수 + 한라봉 아이스크림  

-석식: 전복회 +전복죽 + 찐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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