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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May 26. 2017

약속한 시간은 자꾸자꾸 흐른다.

07.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약속한 시간은 자꾸자꾸 흐른다. 


전날 마신 커피에 한껏 각성되어 맨 정신으로 밤을 보내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평소처럼 한껏 설레는 기분이 아니라 왠지 자꾸 걱정만 앞선다. 


우선은 아이와 떨어져서 비행기를 타게 된 일이 어쩐지 운명처럼 무언가 불길한 일을 알리는 싸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이 들어서였다.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런 사정을 이리저리 설명해도 나와 아이의 표는 변동이 안 된단다. 이유인즉슨,  소셜에서 구매한 표는 변경이 불가하기 때문이란다. 아이비동반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아이 혼자 예약이 된 것 자체를 문제 삼았지만 여행사 탓이지 자기네 탓이 아니란다. 


결론은 좀 더 꼼꼼한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이다. 

엄마의 덜렁됨으로 아이가 큰 위기에 빠지는 일이 비단 이런 일 뿐이겠는가 싶다. 


도리가 있겠는가. 

예정대로 나 먼저 도착하고 남편과 아이는 2시간 후에 도착하는 것으로 하고 아이와 마지막 같은 뽀뽀를 하고 헤어졌다. 남편은 일부러 실수한 것 아니냐며 농담 섞인 비난을 하지만 막상 아이 없이 비행기에 앉은 것이 실로 오랜만이어서 몸은 솔직히 편했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간단히 아침을 때우려던 계획은 시간 상 물거품이 되고 제주에 도착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홀로 여행하는 그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은. 


남편으로부터 아이가 공항에서 잠들었다는 메시지를 끝으로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혹시 아이가 잠들어서 허둥거리다 비행기를 놓쳤나, 아님 비행기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 도착층으로 내려갔다. 모든 항공기가 10분씩 지연되는 상황에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는 안내판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공항에서 잠든 아이가 비행기가 착륙해도 계속 잤단다. 덕분에 남편모자만 한자리 차지하고 편안하게 오고 아이는 아빠의 품 속에서 제주 땅에 도착했다.

엄마 찾으며 울지도 않고 아빠와 놀다가 대기의자에서 안쓰럽게 잠든 겸이.



꿀잠을 자고 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고, 원숭이처럼 꼭 매달려서는 마치 며칠을 떨어져 지낸 모자마냥 우린 한참을 서로 부벼댔다.      





이제 제주다! 





공항을 나서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택시를 탈 수 있는데 제주시 방면 택시와 서귀포시 방면 택시가 나누어 줄을 서 있다. 제주항은 제주시에 있으므로 우리는 제주시 방면 택시를 탔다. 


연세가 있으신 할아버지 기사님이었는데 아주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말끝마다 “~예.”라며 낯설지만 친근한 제주도 사투리를 쓰셨는데 지나가는 곳곳마다 제주의 과거와 변화에 대해 한 말씀씩 해주셨다. 짧은 시간 동안 제주가 너무 많이 변했다 하신다. 옛날에는 일본군 비행기지였던 곳이 이렇게 비행장을 만들어 하루에도 수십 편씩 비행기가 오고 가는 것도 모자라 제2공항까지 만들다니 너무 놀랍다 하신다. 


또, 중국인들이 제주도 땅값을 다 올렸다 푸념도 하신다. 옛날에는 말뚝 박아 새끼줄 쳐놓고 짐승들 기르며 여기 내 땅이다 하면 내 땅이 되었는데 지금은 여간 비싼 게 아니라는 우스갯소리도 해주셨다. 탐라국 시절 이야기며 과거 유치장이나 관공서가 지하에 있다는 말씀까지 9 부두에 도착하는 30여분 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이 깜빡 아줌마는 다 기억도 할 수가 없었다. 





출입구 오른편에 반가운 우리 차가 보인다. 

어제 맡길 때만 해도 불안불안해서였는지 평소보다 더 반갑다. 



제주에서의 상봉은 자동차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반가운 모양이다. 



할아버지 기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부두 앞, 바다 어귀 같은 곳이 낚시터라 하셨다. 

바람도 선선하고 경치도 이만하면 꽤 볼 만하다. 



부두 앞 풍경



바람도 쏘일 겸 잠시 차에서 내려 산책하는데 두 남매를 데리고 나온 아빠가 드론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바람에 아이는 입만 열면 ‘파란색 비행기’를 노래하게 되었다. 오늘로 딱 26개월 차에 접어드는 아이와 항상 모든 것이 초보인 엄마는 제주를 떠나기 전 드론 조종을 해보게 될 것인가.



드론 구경에 신이 난 아이



어제까지만 해도 제주 가면 운전은 내가 한다고 큰소리쳤는데 막상 항구에서 차를 몰고 나올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슬그머니 아이를 데리고 뒷좌석에 앉았는데 남편도 별말이 없다. 주인분에게 전화를 하고 30분 뒤 숙소에 도착했다.     






아고집. 


아빠가 고친 집의 준말이다. 

그 아빠가 마당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찍고 계셨다. 주인 내외는 우리를 보고는 얼른 올라오셔서 인사를 하시고 남편과 함께 짐을 날라 주셨다. 역시 엄마 아빠와 아이가 함께 있는 집을 선택하기는 참 잘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도움받을 수 있다는 것은 타지에서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두 분과 인사를 한 후 안주인께서는 숙소 사용법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다. 

펜션이나 리조트와는 다르게 주인의 손길이 직접 간 집은 여간 맘에 드는 게 아니었다. 소품이나 조명, 가구 모두 꽤 신경 쓴 흔적이 묻어났고, 아직 오픈한 지 오래지 않아 깨끗하고 쾌적했다. 남편은 집 정말 잘 골랐다며 곧 이사 갈 우리집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마당이 있어 참 좋다.


무엇보다 아이가 신이 났다. 낮은 프레임에 매트리스만 얹어서 위험하지 않은 침대 2구를 붙여놓았더니 폴짝폴짝 신이 나서 뛰고 구르는 모습에 보는 내가 흐뭇해졌다. 게다가 집 앞 잔디마당에서 통나무를 굴리거나 비눗방울을 날리면서 여간 흥이 난 게 아니다. 





“겸아, 여행집 좋아?”


“응. 여행집 좋아”



아직은 속단이지만 일단 지금은 오길 잘했다. 



애써 정성스럽게 가꿔놓은 집. 

소중하게 아끼면서 잘 지내보자꾸나.    


                  



Epilogue

짐 정리 후 고등어쌈밥으로 외식을 하고, 하귀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봤다.
제주에서 가장 매출이 높은 마트라는데 그 명성만큼이나 사람이 엄청 많았다. 장을 보고 나오는데 차키를 어디 두었는지 헤매는 나에게 남편이 항상 같은 곳에 두라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장을 보며 둘을 혼자 두고 갈 생각에 사소한 것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고 해명하며 사과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도 못 챙기는 얼치기 바보로 치부당하는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오늘의 가계부}
항구까지 택시비 약 7천 원
저녁식사(고등어보쌈) 33000원
마트(장류, 음료, 생선, 고기, 야채, 계란 등 식재료) 약 11.5만원




Today's meal     

-석식: 고등어쌈밥(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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