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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May 27. 2017

생활이 배움이고, 자연이 학교인 곳

08.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2일 차






아침 8시 반. 


아이가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한다. 자기가 일어났으니 엄마도 일어나라는 신호다. 

바뀐 잠자리에 아주 깊은 잠을 잤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개운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엄마, 밖에 나가요"



일어난 내게 아이가 던진 첫 말이다. 


너도 알고 있구나. 


여기가 우리집 같은 아파트가 아니어서 문만 열면 흙과 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침부터 바람이 꽤 불었다. 하지만 춥지 않은 바람이다. 가벼운 점퍼를 입혀서 마당으로 내보냈다. 



“엄마, 이것 봐요!
여기 하얀 꽃이 피었어요.” 


아이는 마당에 피어난 꽃 마저 신기하다.



신기한 듯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행복은 과연 멀리 있지 않구나 싶다. 


마당에 달린 호박과 아직 푸른빛의 청귤이 싱그럽다. 


물론 아이는 이것을 따고 싶어 한다. 다행히 여기 이모가 6개까지는 허락해 준댔어. 가기 전까지 6개를 맞추려면 5일에 하나는 눈 감아 줄 수 있다. 


훗날 우리의 부침개 재료가 될 운명의 호박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청귤



이후에도 아이는 “엄마, 멍멍이도 일어났어요?”, “엄마, 이건 뭐예요.” 또다시 끊임없는 질문 세례를 했다. 



그래도
눈만 뜨면, 그리고 문만 열면,
밟을 수 있는 '말랑한 땅'이 있다는 것은
아이에게도 내게도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젯밤 더부룩한 기분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막상 아침이 되니 남편이 함께 있다는 게 여간 든든한 게 아니다. 남편은 마늘을 찾으며 미역국 끓일 준비를 했고, 그 덕분에 나는 나갈 채비를 할 수 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몇 가지 반찬과 계란후라이, 미역국. 이렇게만 해도 꽉 찬 아침상 같다. 


우리의 첫 아침상


제주에 여러 차례 와봤지만 오늘 같은 아침은 처음이다. 


사방으로 바람이 '쏴아'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데 그 가운데서 나는 식사를 한다. 


여행 갈 때마다 아이와 같이 먹기 좋은 식당을 찾고, 그 중에서 아침식사가 되는 곳을 찾아 미리 정해두고 잠들던 때와는 다르다. 


밥을 먹던 아이가 습관처럼 식탁을 떠나 집안을 돌아다녀도 한숨 쉬지 않을 수 있으며, 웃으며 지켜보다 일정시간이 되면 치울 수 있는 마음의 낙낙함도, 이 곳이니 가능한 여유다. 


그래. 천천히 하자. 


한숨 쉬며 고치려 들지 말고, 기다리면 아이도 어느새 ‘안 되는 것’을 이해하게 되겠지.    




오늘의 첫 목적지는 바다다. 

근처 해수욕장 중에 가장 가깝고 겸이처럼 어린아이들이 놀기 좋은 곽지과물 해수욕장


운전석엔 당연 내가 앉았다. 나도 남편도 긴장되는 운행이었지만 별일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 


볕은 좋은데 바람이 꽤 센 편이다. 주인집에서 빌려준 파라솔은 설치하다가 포기했고, 돗자리에 돌을 받쳐 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파스텔톤 바다. 

역시 애월 바다가 주는 고유함이 있다


제주 바다라도 바다마다 빛깔이 다르다.


다른 해수욕장에서 보지 못한 노천탕이 있고, 겸이만한 아이들이 놀기 좋을 놀이터가 있는 곳이었다. 용천수가 흘러서인지, 이제 날이 선선해져서인지 수영하기에 물은 찬 편이다. 


바다를 품은 미끄럼틀


모래놀이라도 하라고 옷을 갈아입히고 물가로 보냈다. 꼬마친구들 놀기 좋으라고 일부러 돌로 막아놓은 것처럼 얕은 '천연'수영장이 있다. 


8월 31일 이후로 안전요원이 없기 때문에 입수를 금지한다는 플래카드가 있었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고 여기저기 퐁당퐁당 다리를 담그며 뛰어다니고 우리 겸이만한 꼬마친구들은 모래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엄마! 미역!”





미역처럼 생긴, 미역일지도 모르는 줄기를 들고 내게 보인다. 


배움이 따로 없다. 



생활이 배움이고, 자연이 학교라는 말이 실감난다. 




무슨 일이건 아직은 엄마를 찾는 나이. 


하지만 바다에 오니 다르다. 

혼자서 오래 들여다보고, 혼자서 오래 만든다. 

그 덕에 난 오랜만에 편안히 셔터를 눌렀다. 



혼자서 오래 놀게 해 주는 바다



감성 충만한 남편도 한참은 먼 바다를 촬영하더니, 나중엔 손에 피까지 내며 바위에 붙어있는 생물을 채취하느라 바빴다. 아침에 심심했던 미역국에 넣을 거라고 성인 남자 손톱만한 까만 조개를 잡아왔다. 조개 외에도 하얀 모래색과 구분이 안 가는 게도 있었는데, 게도 보호색이 있나 보다며 어른인 우리도 꽤 신기해했다. 게들은 워낙 작아 일부는 방생해주고, 나머지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게를 잡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넘겨주었다.



남편에게 잡힌 억울한 녀석들




그렇게 평화로운 곽지 바다에 시선을 모으는 한 무리가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서양인 여성들이 비키니를 입고 등장한 것이다. 단순한 비키니가 아니고 ‘티팬티’라고 불리는 하의를 입고 있어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데, 여자인 나로서도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물론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편안히(?) 봤지만, 남자들 특히 아빠들은 여간 떨리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그녀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까운 바위에 올라서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데, 괜스레 민망하면서도 젊음이 방출하는 탱탱함은 나 역시 설레이고 좋았다는 것.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는 어김없이 잠이 들었다. 


달콤한 휴식시간. 


그 사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고, 남편은 편의점에서 사 온 떡볶이로 점심준비를 하면서 저녁식사는 무엇으로 할까를 물어왔다. 집에서도 휴일이면 제 일인 것마냥 주도적으로 나서는 남편이지만, 여행이기에, 그리고 처자식만 남겨 놓고 가야 하기에 더욱 적극적인 듯했다. 


저녁 메뉴는 돼지 숯불구이로 정했고, 남편이 장을 보러 간 사이 나는 깨어난 아이에게 간단히 주먹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였다. 1만 원이면 숙소에서 그릴과 숯을  빌릴 수 있는데, 나랑 아이 둘만 있으면 절대 해 먹지 못할 요리이기에 남편 있을 때 먹기로 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먹었던 것을 끝으로 야외 숯불구이는 처음이다. 


가든 비비큐가 별 건가.


설명 들은 대로 뚜껑을 덮어 익히니 훈연의 맛이 꿀맛이다. 아이는 늦은 점심을 먹은 탓에 고기에는 관심이 없고, 그릴에서 나는 연기를 보며 소방차를 불러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며, 불쏘시개로 뭔가를 잡는다고 뛰어다닌다. 


아이가 잘 먹는 모습만 보아도, 부모는 배부르다.  


하지만 안 먹고 잘 노는 모습만 봐도 배부른 '오늘'이다. 







Epilogue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반딧불이가 날아들었다. 어릴 적 외가에서 본 후로 처음이다. 남편과 나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떼지 못했으니, 아이는 오죽했으랴.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데다 요즘엔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반딧불이다. 불을 찾아 날아든 모양인데,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처마에 연신 박아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오랫동안 반딧불이의 비행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윽고 반딧불이는 갈 길을 찾아 날아갔다. 아이는 계속 아쉬워하며
“반딧불 또 보고 싶은데. 반딧불.”
이라고 울먹인다.
“겸아. 내일 또 반딧불이 만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해봐.”라고 말하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시늉을 했더니 그것을 따라 한다.

“내일 또 반딧불이 만나게 해주세요.”

그런데 그 기도가 이렇게 빠르게 통할 줄이야.

반딧불이는 다시 우리에게 날아와 주었다. 이번에도 아까 그 시간만큼 방황하다 다시 갈 길을 찾아 날아갔다. 아이는 또다시 기도를 했다.

오늘 밤 아이는 반딧불이 꿈을 꿀 것 같다.  

 {오늘의 가계부}
편의점 점심식사 약 7천 원
마트(숯불구이 재료 및 천연조미료, 멸치, 간장, 마늘) 약 6.2만 원



Today's meal     

-조식: 미역국과 계란후라이 

-중식: 편의점 떡볶이/주먹밥 

-석식: 돼지숯불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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