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3일 차
아이를 재운답시고 누워서 책을 읽어주다 나도 그만 같이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아침 7시 반.
얼굴은 볼썽사납게 기름으로 얼룩져 있다.
매일 아이와 함께 낮잠을 자다 보니, 이를 거른 날은 피곤해서 견디기가 힘들다. 씻지도 못한 채 잠든 날은 찝찝한 기분에 몇 번을 깨다자다 하면서도 결국은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한다. 슬그머니 일어나서 클렌징을 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아 ~ ” 하는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씻고 나와보니 남편이 책을 읽어주고 있다.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는 “엄마 내 도시락은 어딨어요?”란다. 아빠가 읽어준 책이 바로 ‘도시락이 어디 갔지?’였던 것이다.
“으응... 다겸이 도시락은 엄마가 만들어야지. 다겸이 어떤 도시락이 갖고 싶어?”
사실 도시락을 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남들은 데이트할 때, 예쁜 피크닉 용품에 정성스레 싼 도시락으로 여친으로서 솜씨와 애정을 과시할 때, 나는 제과점에서 맛있는 샌드위치를 사서 갔었다. 물론 나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가끔 남편 다이어트용으로 야채만 가득 넣어서 싸 보낸 적은 있지만, 아이를 위해 도시락이란 것을 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린이집을 다녀서 소풍을 간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시락을 만들어주겠다는 나의 즉흥적인 선언은 과거 내 전적으로 미루어, 참으로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주먹밥 틀도 사 오고, 김도 있었고, 집에서 가져온 까만깨 소시지 볶음도 있었다. 그래서 깜짝 탄생한 토끼 도시락. 아니, 토끼밥. 비루한 솜씨에도 아이는 민망하리만큼 “우와~”하는 감탄사를 연신 내뱉고는 날름 귀부터 떼어서 먹었다. 엄마들이 왜 '예술 도시락'을 만드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아이도 역시 입 짧은 남의 집 아이들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식사가 먹히는 그런 아이였던 것이다.
엄마가 좀 더 노력해볼게.
아침식사는 오늘도 남편의 도움을 받았다. 이러다 남편 돌아가고 나면 어떻게 버티지 싶으면서도 당장의 편안함에 못 이기는 척 양보를 했다. 남편은 엄마 손에 굶고 살지도 모를 아들 걱정에 간단한 밑반찬이라도 만들어 놓고 가겠다며, 멸치, 콩, 간 고기 등 몇 가지 식재료를 사다 놓고 요리책을 펼쳐 하나씩 만들어갔다.
멸치볶음을 만들며
“꽃순아, 쉽다 쉬워. 이건 라면 끓이기보다 더 간단해. 블라블라블라...”
라고 말했다.
아마 간단하니 너도 배워두었다 해주라는 말이겠지만, 정말 한식은 어렵고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나는 티 안 나게 반대쪽 귀로 흘려보냈다.
어제 곽지에서 잡은 조개류는 하룻밤 해감 후 미역국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차려진 아침상으로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인 언니(?)였다. 직접 볶은 콩으로 내린 커피를 나눠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이런 횡재가 있나.
우리 남편도 나름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분이시나,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점점 바쁘고 정신없어서, 최근엔 내려먹는 일이 점차 뜸해졌다. 그렇지만 나름 배운 사람이라고 눈이 반짝, 관심을 보이며 물어본다.
“직접 콩도 볶으세요?”
“배달해서 먹으려면 그 배송비가 더 비싸서요. 남편이 워낙 커피를 좋아하는데 매번 사서 마시려면 그 돈을 감당할 수도 없고 해서.”
부드러운 커피향을 맡으며 밥을 먹고, 적당히 식었을 무렵 커피로 후식까지 마쳤다.
오늘은 근처에 있는 애월도서관과 택시 할아버지가 추천하셨던 더마파크에 승마체험을 하러 갈 계획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몽고말이라 어른 말도 키가 작다고 하기에 겸이도 태워볼 수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대문을 나서는데 주인 언니가 오늘 비가 올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가 아직 어려서 승마체험을 못할 수도 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정보를 검색해 볼 요량으로 우선 도서관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애월도서관.
파스텔 그린으로 된 건물로 2층에 유아실이 있다. 남편과 아이는 먼저 들여보내고, 나는 도서관 가입방법과 대출에 관해 문의하러 갔다. 제주도서관을 이용하려면 제주로 주소이전을 해야 하며, 주인에게 주소이전이 가능한지 먼저 문의를 해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도서관으로 전화문의한 결과, 온라인으로 본인인증만 되면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회원 가입하려고요.”
라는 나의 말에 밝은 미소를 보이며, 본인명의 휴대폰이 있느냐고 물었고, 이어 인천도서관에 회원가입이 되어 있느냐고 물어왔다.
통합도서서비스 참여 도서관에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경우, 카드만 제시하면 등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곳 도서관에 등록함으로써 제주의 통합도서 참여도서관 15개소를 모두 이용할 수 있다. 현재 전국망을 추진 중에 있으니 제주에 방문 전에 해당 지자체 도서관이 통합도서서비스 참여 도서관인지 제주 쪽 도서관에 문의해본 후, 카드를 지참하고 가면 편리하게 등록하고 대여할 수 있다. 참고로 1개소 5권까지 대출 가능하며, 대출기간은 15일에 연장 불가하다. 제주시 타 도서관까지 도합 하면, 1인당 20권까지 대출 가능.
아이와 함께 올 때 굳이 많은 책을 챙겨 오지 않아도 된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유아실에 들어 가보니, 아이는 이미 여러 권을 읽었고, 이어서 볼 책을 고르고 있었다. 이후 남편은 제주에 있는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있어 나가고, 나와 아이만 남아 오랜만에 열심히 책을 읽었다. 오랜만인 것은 앞서 말한 상황들로 아이가 뽀로로․폴리․타요․콩순이의 노예가 되어 책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래에 비해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하고, 책의 수준도 또래보다 높아서 스토리가 없는 책을 읽어주면 “재밌는 거 읽어주세요.”, “아가들이 보는 거예요.”라며 흥미가 없음을 표현한다.
내가 우리 아이의 독서 수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유가 있다.
남편이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엄마 한 명과 아이 둘이 도서관에 왔다. 한 명은 5살 정도 되어 보이고, 한 명은 다겸이보다 조금 어린 듯한 아이들이었다. 엄마는 책을 하나 골라 큰 아이에게 말한다.
“이거 다 읽을 때까지는 못 나가.”
그러고는 꽤 상냥하고 큰 목소리로 그리고 어른이 듣기에도 꽤 빠른 속도로 숨도 쉬지 않고 읽는다. 큰 목소리에 신경이 거슬렸지만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작은 아이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책을 빼놓고, 제 엄마에게 “엄마, 잉잉... 블라블라(아직 정확하게 말을 못 하는 수준)...”하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대답을 들고나서 아이가 나가기를 재촉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았어, 언니 이 책 다 읽을 때까지는 여기서 못 나가요.”란다.
책읽기를 하고 있는 큰 아이는 엉덩이가 들썩들썩,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작은 아이도 지루해서 왔다갔다.
짜증과 한숨이 동시에 일었다.
이게 누구를 위한 책읽기란 말인가.
아이가 책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시기는 아이마다 다르다.
겸이는 그 시기가 또래에 비해 빨랐던 편이고, 대부분은 더 커야 그 시기가 오는 듯하다. 그런데 많은 엄마들이, 아이가 책에 흥미가 없다며 조급해한다. 기다리지 못하는 엄마들 덕분에 아이들은 책에 흥미를 붙이기도 전에 질려버린다. 어쨌든 그 엄마의 교육철학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지만, 안타깝기는 하다.
이어서 들어온 또 한 명의 엄마도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큰 아이들끼리는 아는 사이인 듯했다. 더 신이 나서 큰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그들 엄마는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의 눈빛만 발사할 뿐 어느 엄마 하나 아이들에게 “쉿!”이라는 짧은 메시지조차 주는 이가 없었다. '유유상종'은 이래서 나온 말인 듯. 나를 비롯한 다른 팀들은 '우리의 불편함에 대해' 눈빛과 표정으로 서로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도서관에 아이를 데리고 오기 전에 최소한의 도서관 에티켓도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것.
책을 읽어줬을 때 그 내용을 이해하는 수준의 아이라면 “도서관에서는 쉿!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거야.”라는 말도 이해할 것이다. 그 정도의 이해력이 안 되는 어린아이에게는 책을 대출하여 집에서 읽어주는 편이 낫다. 괜히 도서관 가는 습관 들인답시고 무작정 아이를 데려오는 건 아이에게도 결코 좋은 교육이 되지 못하며, 남들에게도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선사한다.
물론 아이를 둘 이상 키워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항변하는 엄마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과 마주했던 교사로서도 엄마들의 그런 행동은 결코 교육적이지 못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책 한 권을 읽어주는 것보다 배려와 에티켓을 가르쳐주는 것이 우선
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3시간 정도 책을 보고 나니 슬슬 잠이 오는지 자꾸 안아달라 한다.
마침 밖에는 세찬 소나기가 내렸다. 아침부터 꾸물꾸물하더니 콜택시를 부르기에도 강한 비여서 남편이 오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공룡책을 빌려가겠다는 아이는 안자마자 잠이 들었고 다행히 잠이 들자마자 남편이 도착했다. 5권의 책을 빌려 도서관을 나왔다.
점심을 넘긴 시간인데, 아이가 잠들어버렸으니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갈 상황도 아니다. 간단히 빵으로 때울 생각으로 빵집을 검색했다.
도서관에서 1㎞ 정도의 거리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 까미노(CAMINO).
비가 오는데도 사람이 많은 걸 보니 꽤 유명한 카페였나 보다. 2시까지 브런치가 가능하고, 5가지 조각 케잌과 베이글, 치아바타를 판매하는데 조각케잌은 포장이 안 된다고 한다. 상황 상 포장해서 나와야 했기에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었지만, 모던한 건축물에 편안한 내부 인테리어가 근사한 곳이었다. 더 마음에 든 것은 'LA IDEA'라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서, 사색과 독서를 위한 사람들이 아이들이나 시끄러운 수다 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공간을 분리해서 운영하니 아이와 함께 가는 이들도 눈치를 덜 보고 즐길 수 있는 곳인 것 같아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카페를 나왔다. 비 오는 날이 더 운치 있어 보이는 까미노는, 주차공간은 넓지 않으니 찾아가실 분들은 참고하시길.
치아바타는 어른이 먹기에는 쫄깃한 식감이 장점이지만, 아이가 먹기에는 좀 질긴 빵이다. 하여, 근처에 ‘숙이네보리빵’이라는 곳을 검색해서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거기로 갈 것을 그랬다. 빵집 투어도 아닌데 점심식사를 위해 두 군데 빵집을 들른 건 잠든 아이를 생각하면 좀 미안한 일이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엄마들은 참으로 많은 선택과 마주하게 된다.
엄마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아이가 더 고생을 할 수도, 덜 고생할 수도 있기에 엄마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참 많은 고민을 한다. 가급적이면 경제적이고 현명한 선택을 하고 싶어 하며, 이 때문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가끔은 그런 나의 모습이 미련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고민의 시간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숙이네보리빵’은 총 4가지의 빵만 판매한다. 개당 600원이며, 세트로 살 수도 있다.
바로 옆에는 '숙이네 찻집'도 있어서, 이 곳에서 음료를 마시면 보리빵을 하나 주신다. 암튼 '숙이네보리빵'집도 유명한 곳인지 가게 안에 들어서니, 전국으로 가는 택배 상자들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각종 매스컴에 출연했던 사진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기대감을 안고 고르려는데 아주머니가 주차 이야기부터 하신다. 건너편 철물점 앞에 대면 말이 많이 나오니 이동 주차하라는 것이다. 남편에게 차를 돌리라고 연락하고 빵을 고르며 이런 대화를 했다.
“어떤 빵 살 거에요예?”
“4가지 중에서 고르는 거죠?”
“큰 거 있고 작은 거 있어요예.”
“그럼 600원은 작은 거 가격이에요?”
“다 600원이에요예. 큰 거는 팥이 없고, 작은 거는 팥이 있는거에요예.”
“아... 그럼 골고루 주세요.”
“지금은 보리빵 밖에 안될거에요예.”
‘그럼 처음부터 보리빵만 된다고 말씀하시지 뭐 살 거냐고 물으신 건 또 뭐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손님이 4개를 먼저 주문했다.
그런데 아주머니 왈 “5개 사면 안되요예? 잔돈이 없어요예.”란다.
너무 많다고 하니 “그럼 3개사요예. 200원은 있으니까.”
아주머니의 성품인지, 유명한 가게의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도시에서의 삶과 다른 것은 이런 것인 듯하다. 도시에서는 잔돈이 없는 것은 손님이 부담해야 할 몫이 아니다. 어떻게든 잔돈을 만들어서 거슬러 주는 광경이 오히려 더 익숙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유명한 빵을 사려면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이런 대화를 남편에게 전해주니 남편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가게 벽에 붙은 레시피대로 계란후라이에 치즈에 케찹까지 넣어 깨어난 아이에게 주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아이가 “으음~ 마시쪄.” 이러면서 빵을 너무 잘 먹는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맛 좋고 아이가 잘 먹으니, 충분히 감수할 불편함이라는 결론.
저녁은 남편이 떠나기 전 처자식 몸보신을 시켜주고 싶다고 해서 고른 메뉴이다.
큼직한 활전복을 이용해 만든 갈릭전복버터구이.
그리고 혹시 반찬 없을 때 먹이라며 낮에 만들어놓은 햄버거 스테이크.
입이 호강하는 저녁이다.
'내일부터는 이런 호사를 못 누리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잠이 잘 오질 않는다.
Epilogue
더마파크는 아이의 개월 수로 인해 가지 못했다. 최소 36개월 이상은 되어야 승마체험을 할 수 있으며, 어른이 안고 탈 수도 없다고 하니 포기. 아침에 주인언니의 조언이 없었다면, 전화문의 없이 무작정 갔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비가 오기에 차라리 잘 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기마공연'은 꽤나 볼 만하다기에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오늘의 가계부}
까미고 치아바타 4.5천 원, 숙이네보리빵 3천 원
마트(전복구이 재료 및 식용유, 참기름, 올리고당) 약 6.2만 원
Today's meal
-조식: (어른) 미역국과 멸치볶음 (아이) 토끼주먹밥
-중식: (어른) 치아바타 (아이) 보리빵 토스트
-석식: (어른) 갈릭전복버터구이 (아이) 햄버거 스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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