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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May 30. 2017

더 행복해지기 위하여

10.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4일 차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아마도 남편이 돌아간다는 사실이 긴장을 불러온 모양이다.


혼자서 아이를 케어해보겠다고 작정한 제주살이이지만, 그동안 남편이 함께 해 준 몫이 엄청 크기에 이제 정말 '리얼 제주육아'에 들어선다고 생각하니 어느 때보다 걱정이 된 것이다.


하필 어젯밤 늦게 잠든 아이까지 같이 일찍 일어났다. ‘하필’이라고 표현했지만, 씨익 웃으면서 품에 안기는 아이를 보니 마냥 사랑스럽다.


“겸아, 아빠 이제 집에 돌아간대. 이제 겸이랑 엄마랑 둘이만 지내야 해.”


이제부터 겸이의 보호자는 나 혼자이지만, 겸이 역시 내 제주살이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보호자이기에 아이에게 하소연을 해본다.


어젯밤 계획한 대로 오늘은 비자림이나 사려니숲길을 가 볼 터였다.

어제 비가 조금 내렸으니 오늘은 숲길 걷기가 상쾌할 것 같았고,

또한 운전이 아직 설어, 남편 있을 때나 가볼 수 있는 곳이란 생각 때문이다.


아침을 챙겨 먹으면 아무래도 출발이 지연될 터이니 간단하게 프렌치토스트를 해서 차 안에서 먹기로 했다. 가는 길에 엉클통김밥에서 점심 요깃거리도 샀다.


우리의 아침밥. 프렌치토스트




비자림까지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외길로 되어 있는 도로를 바짝 쫓아 붙어서며 위협하는 관광버스에 어떤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급기야는 크게 '빠앙'하며 중앙선을 넘어 휙 추월하는 버스에 다리가 후덜덜했는데 또다시 그 관광회사 버스였다. 안 그래도 초보운전자라 잔뜩 긴장했는데 빗길에 그렇게 재촉과 위협을 받으며 운전하려니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남편도 씩씩거릴 정도로 상식을 벗어난 운전이었다.


그런데 막상 비자림로에 들어서니 이전과는 다르게 갓길에 주차할 수가 없다. 2차선 도로에서 수많은 관광차량의 주정차로 인한 통행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동차 공해로부터 숲길의 대기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어찌어찌해서 새로운 사려니숲길 입구를 찾았다. '사려니숲길 붉은오름 입구'로 검색해서 가야 한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도착하니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비 온 후 숲길을 걷고 싶었지만, 비 내리는 숲길은 아이를 데리고 쉽지 않을 터였다.

남편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입구에 가서 향기라도 맡고 오란다.

이슬비를 맞으며 입구에 들어서는데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청량한 향과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비 좀 맞더라도 아이에게 이런 공기는 맡게 해주어야지.


유모차에 커버를 씌우고 아이를 옮겨 태웠다.


그 사이 아이는 잠에서 깨었고 다행히 비도 멎었다. 입구에서 몇 미터는 포장도로였고, 다시 몇 미터는 비포장도로였다. 책에서 본 '바퀴 큰 유모차는 가능할 것 같다'는 표현이 이해가 갔다.


“겸아 흠~하고 숨을 들이켜 봐. 좋은 냄새가 나지?”


“응. 나무 냄새가 나요.”


자연이 준 모든 것을 만끽하는 순간.   비온 후,  숲 속 흙길을 걷는 일.



두 돌배기 아이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욕심내서 끝까지 걸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어느 정도 걸어가니 아이가 걸어온 길을 반대로 다시 뛰어가며 달리기를 하잖다.


불안한 달음질을 하다가는 멈칫 선다. 책에서 보았던, 동굴동글 다각형 거미줄을 보고는 신기해하는 아이.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손을 뻗는다.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이 영롱하다.


이번엔 숨바꼭질을 하자며 대뜸 눈을 감는다. 숨은 엄마의 뒤꼭지를 찾아내고는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비로 묵직해진 사려니 숲길을 가붓하게 만든다.  


비 젖은 사려니 숲길. '번개~파워!'


이렇게 보내고 와도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남편의 비행기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약 3시간 남짓.


그 사이 남편은 이 곳 오는 길에 봐 둔 이정표가 있다며 열심히 검색했다.

그 결과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공룡휴게소박물관’.


가는 길에 비가 세차게 내렸다. 

전국적으로 비 소식이 있었지만, 예보에 의하면 제주는 밤 9시부터 비가 온다고 했었기에 사려니숲길과 공룡박물관을 택한 것이었는데 걱정스러울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역시 한라산 인근의 날씨는 예보만으로는 확신하기 힘들다. 전에도 중산간만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 같은 화창함'을 선사한 적이 많았다. 나쁜 남자 같으니.

 




일단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실내에서 관람이 가능한 곳인지 문의했다. 밖에도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실내 관람이라는 것과 24개월이 넘으면 성인과 입장료가 똑같다는 것. 하지만 잘 이야기하니까 겸이는 무료로 입장시켜 주었다. 정상입장료는 1만 원이지만, 소셜에서 구입하면 약 2천 원 정도 더 저렴하다. 겸이의 무료입장과 함께, 소셜 판매 가격으로 현장 결재했다.


블로그마다 크게 기대하지 말고 가라는 글을 보아서인지 우리는 대체적으로 만족했다. 우선은 겸이 정도의 아이가 보기에 딱 적합한 수준이었고, 공룡과 더불어 몇 가지 체험도 할 수 있으니 비도 피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공룡도 보여줄 수 있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먼저 지하에 있는 공룡관으로 안내해주신다. 매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직원은 모두 할아버지였는데, 손님이 많지 않아서였는지 원래 시스템이 그런지 팀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따라붙어 안내를 해주신다.


우리가 들어설 때는 어린이집 단체팀이 막 돌아간 직후라 내부는 조용했고, 손님은 우리 밖에 없는 듯했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자동차→공룡→로보트의 순서로 흥미가 옮아간다. 현재 겸이는 자동차에 매료되었고, 공룡에 흥분하고 있으며, 로봇에 입문하고 있는 단계이다. 말도 또래에 비해 빨라서인지 공룡이름도 곧잘 외운다.


“우와! 티라노사우르쯔다!”


하고 달려가는데, 커다란 공룡이 '쿠와앙'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기겁한 아이는 무섭다며 뒤돌아서 안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여기 공룡 타보자며 아이를 부르니, 호기심에 이내 다시 슬쩍 가본다.



공룡 첫 목격. 아이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겸아 이건 무슨 공룡이야?”

“트리케라톱쯔! 코뿔소 공룡.”


혼자서 공룡을 독자지 할 수 있는 것에 아이는 꽤 만족한 듯 보였다. 때로는 무섭다며 다가가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등에 올라타며 좋아했다.



어쩌면. 이런 행동으로 '동물은 인간의 정복대상'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공룡 이외에도 ‘번개파워’를 외치며 즐길 수 있는 전기장 체험, 빙글빙글 블랙홀 체험, 거울 미로, 3D 영상 관람 등 몇 가지 체험관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겸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단연 '먹이주기'였다.


전기장 체험


아직은 무엇이든 조심스럽다.


먹어 보렴. 근데 나 사실은 조금 무서워.


만나서 반가워.


남편도 목에 뱀을 두르거나 머리에 도마뱀을 이어보더니 아이만큼이나 긴장하며 좋아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어느정도 그쳐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잠이 들었고, 남편은 도착하자마자 콜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날아갔다.


택시는 번개처럼 와서 번개처럼 싣고 떠났다. 그 바람에 남편과 진지한 이별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다. 그 덕에 눈물은 조금 아꼈지만.


제주에서 처음으로 카*오택시를 이용해 불러봤는데, 남편의 말에 의하면, 제주콜택시 악평에 비해 엄청 신속하고 친절하게 공항까지 가주었다고 한다.


“꽃순아, 차 트렁크에 겸이 줄 선물 하나 사놨어.
있다가 겸이 깨면 꽃순이가 전해줘.”


속 깊은 남편은 언제 이런 것까지 챙겼는지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내 선물도 아닌데.


아무튼 남편이 떠나고 아이는 바로 깨버렸다. 그리고는 평소답지 않게 일어나자마자 아빠는 어딨냐고 찾는다.


역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체감하는 모양이다.


"아빠 비행기 타고 집에 가셨어." 


평소, 집에서는 아빠 회사 갔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길래, 사실대로 이야기해줬더니 바로 울어버린다.


안 그래도, 엄마도 울고 싶었는데...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조금만 더 있다 겸이 깬 거 보고 갈 것을 그랬다며 한탄을 한다. 그리곤 울먹이는 나에게


“행복해지기 위해서 온 거니, 지금 당장은 적적해도 금방 적응할 거야.”


라며 위로한다.


그리고는 여행 와서 괜히 아낀다고 고생하지 말고 필요한 것 다 사보고, 해보고 하란다.

미우니고우니해도 그 순간만큼은 든든한 남편이다.




일부러 장난감을 거의 챙겨 오지 않았지만, 아빠의 선물이라며 전해주니 엄청 좋아하며 반긴다.



하지만 


자동차변신로보트의 난이도는 엄마도 못 따라갈 수준이라,

저녁식사를 하기 전까지 아이는 짜증과 울음을 반복하며 나를 지치게 했다.




저녁은 첫날 사온 옥돔을 튀겨서 김과 함께 먹었다.

벌써부터 조촐해진 저녁상이지만, 다행히 생선을 좋아하는 아이라 잘 먹어준다.


나의 생선 튀기기 실력.



일단, '오늘은' 넘겼다. 







Epilogue

순간순간 오늘 봤던 공룡과 뱀 이야기를 한다.
“엄마 티라노사우르쯔 보러 또 가고 싶어요.”
“엄마도 뱀 무서웠어요? 덜덜덜 떨렸어요?”

하루에 한 가지씩만 하려던 계획과 다르게, 두 가지를 했더니 아이도 힘든지 일찍 잠이 들었다.

내일은 전국적으로 비가 온단다. 가급적 집에서 쉬려고 한다.
쉰다고 해봤자 밖에서 일정을 만들지 않겠다는 말이지, 아이가 깨어있는 동안은 '쉰다'는 표현은 사실 적절치 못하다.
새로 산 물감으로 어젯밤 먹은 전복 껍데기 색칠을 해볼까 한다.

{오늘의 가계부}
엉클 통 김밥 9.5천 원
박물관 입장료 1.6만 원 +먹이주기 1천 원



Today's meal

-조식: 프렌치토스트 + 우유

-중식: 엉클통김밥(삼다김밥, 여우김밥, 통통김밥)  

-석식: 옥돔구이 +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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