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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May 31. 2017

우리집 토토로

11.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비 내리는 5일 차



밤사이 개가 엄청 많이 짖었다. 


남편이 있는 동안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하필 남편 없이 아이랑 둘이 자는 첫날, 그렇게 짖어대니 괜스레 무서웠다.


아파트가 아닌 것은 이럴 때 조금 불리한 듯하다. 누군가 낮은 담을 넘어 들어와 전기충격기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상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아침을 맞았다.

예보대로 비가 내리고 있고, 방안은 평소보다 좀 더 어둑했으니 아이가 조금 더 잘 자주리라는 기대를 했지다. 하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8시가 '땡'하자마자 아이는 “엄마, 우유 한 잔 주세요.”라며 나를 깨웠다. 못 들은 척하고 싶었지만, 두 돌배기 아이가 '수량사'까지 써가며 우유를 달라는데 신기하여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유를 먹이고 다시 재울 요량으로 “방에서 기다려.”라고 말하고 나왔는데, 금세 쪼르르 따라 나온다.

“기다리라니깐.”이란 나의 말에, “뽀뽀해주려고 나왔지.”라고 대답하는 아이를 어찌 더 채근하겠는가. 이런 아들바보.


그렇게 아침 뽀뽀를 받고 나의, 아니 우리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밤새 내린 비에 마당의 초록들은 더 짙푸른 색깔을 내고 있었다. 초록에 맺힌 물방울 하나하나가 영롱했고, 초록들은 더더욱 선명했다.



아이가 비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에 살면서 비가 내린다고 하여 아이에게 비옷을 입혀서 내보내지는 않기에, 가까이서 본 빗방울은 아이 눈에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집 안에서 '하나둘셋' 카운트하며 펼쳐만 보던 우산을 이제 제대로 써보자꾸나.


잠옷 바람에 방수 점퍼만 입히고는 우산을 들려 내보냈다. 우산 위로 '토도독'하고 떨어지는 빗물이 신기했는지 연신 고개를 젖히고 우산의 천정을 바라본다. 순간, 우산을 처음 쓴 토토로가 빗방울 소리에 놀라며 좋아했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토도독' 빗방울이 신기하다.
'토도독' 소리에 놀란 토토로.


그렇게 놀고 있는데 쥔장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겸이 벌써 일어났네.”

계단을 내려오셔서는 이번 주말까지 계속 비가 온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셨다. 그리고 비 올 때 운치 있게 가볼 만한 곳으로 절물휴양림1100고지추천해 주셨다. 집에서 쉬기로 했으니 오늘은 패스했지만, 다음을 위해 메모를 해두었다.


쥔장님은 작은아이 어릴 때 보던 책이라며 책 몇 권도 내려다 주신다. 그 자리에서 2권을 훌쩍 읽고는 또 읽어달라는 아이를 간신히 꼬드겨 집으로 들어왔다.




아침은 계란국을 끓였다. 냉장고를 뒤져도 딱히 국거리가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밥이 되게 지어져서 국이 필요했다. 배가 고팠는지 아이도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초반에는 기가 나서 열심히 먹더니, 점점 속도도 흥미도 떨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손에 들고 있는 로봇에게 한입 주니 자기도 먹어본단다. 그렇게 로봇과 경쟁하며 무난히 식사를 마쳤다.



아이고, 한 고비 넘겼다. 


언제쯤 되면 식사시간이 의무감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식사 후에는 어제 계획했던 대로 물감놀이를 했다. 

물감놀이 옷, 물통, 붓, 물감, 그리고 말려둔 전복껍데기, 마당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 낙엽 하나.


빗소리와 선선한 바람이 있는 마당의 테이블 위에 준비했던 것들을 올려놓고 어떻게 하는 건지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아이는 머릿속에 그리던 모습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붓이란 걸 처음 잡아봤고, 물감 짜는 것도 처음 해봤다. 처음엔 칠하는 것보다 색깔별로 물감을 짜는 것에 재미를 붙여, 계속 짜기만 했다. 그다음엔 붓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더니 칠한 데 또 칠하고, 칠한 데 또 덧칠하면서 결국은 까만색을 만들기가 다반사였다.


난생 처음 해보는 물감놀이
전복껍데기에도 색을 입힌다. 집중하니 입도 삐죽.


나의 뜻대로 예쁘게 색칠해보려고 붓을 잡아줄라치면 있는 힘껏 내뺀다. 한창 '내가 직접' 하는 것을 즐기는 시기라지만, 혹여라도 나무 테이블 위를 물감으로 쓱 그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나는, 아직 초보 멘탈 엄마다.


차라리 폴리 매트라도 하나 챙겨 올 것을. 제일 좋은 것은 겨우내 추위 방지로 쓰던 뽁뽁이를 떼어 쓰는 것. 가장 경제적이고 뒤처리도 편할 것 같다. 어쨌든 아이는 꽤나 집중하여 색칠을 했다.


아이의 첫 작품.


결과적으로, 블로그에서 본 아름다운 작품은 최소한 초등학생은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도!

내가 시도해 보았다는 것, 아이가 너무 좋아했다는 것


그 자체에 의의를 두면 나름 성공적인 놀이였다고 생각된다. 슬슬 정리를 하는데 울음보를 터뜨린다.


“엄마, 물감놀이 더 하고 싶어요.”


그도 그럴 것이 물감놀이 도중 할머니에게 걸려온 영상통화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물감놀이하느라 바빠요.”라고 말한 아이였으니 오죽하랴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놀이,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를 접으려니 눈물도 났겠지. 어차피 더러워진 손도 씻길 겸, 목욕탕에서 하자고 제안을 했다. 아이는 쉽게 승낙했고, 목욕탕에서 기다리는 사이, 나는 목욕용 물감을 챙겨서 들어갔다. 물론 나도 옷을 벗고.




붓에 물감을 찍어서 무릎에 찍어주니 신기해한다. 이렇게 묻혀도 되냐는 표정이다. 그래서 이건 손으로 만져도 되고 몸에 발라도 되는 물감이라고 설명해주고, 벽에도 그려주었다. 이내 아이는 '꺄악꺄악' 소리를 내며 제 몸 이곳저곳에 발라본다. 간지럽다면서도 색색깔로 변하는 제 몸이 재미있어 보이는 가 보다. 그러다 흥이 난 아이는 물감이 묻은 붓을 다른 물감병에 '그대로' 투입하려고 했다.



“안 돼!”


나도 모르게 외쳐버렸고, 아이는 울상을 짓는다.


참 안 되는 것도 많다. 


나란 엄마, '안 된다'는 말은 가급적 쓰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 자신과 남에게 위험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데 상황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 역시 “안 돼!”이기도 하다. 여유가 있을 때는 “하지 않아요”라고 제법 상냥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는데, 급할 때는 반사적으로 “안 돼!”가 튀어나온다. 사실, 필요한 만큼 적당히 용기에 덜어서 주고, 물감병을 치웠더라면 그 말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노출된 모든 것이 자기에게 허용된 것이라고 여긴다.


아이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행동이 있다면, 그 행동을 유발하는 조건과 환경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다. 모든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준비를 하면 '안 돼!'는 줄어들지 않을까.

 

첫 바디페인팅.


목욕 후,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소파에 앉아 옆에 눕더니 금방 잠이 들었다.





땀을 흠뻑 적시며 자고 일어난 아이가 난데없이 짜증을 내며 운다. 기저귀를 못 뗀 아가들이 우는 이유는 '졸리거나 배고프거나' 둘 중 하나이다. 잠은 자고 일어났으니 배가 고픈 거다.


급한 대로 '3분짜장'을 데워서 먹였다.

불량엄마의 저녁 밥.  '3분짜장'은 유용했다.


기분이 풀렸는지 신나게 먹더니 낮에 한 물감놀이가 또 하고 싶단다. 기껏 씻겨놨더니. 더군다나 어두워서 밖에서 하지도 못 한다. 설명해주었지만 들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집에서 가져온 ‘하루 10분 엄마놀이’책을 꺼내와서 겸이와 할 만한 몇 가지 놀이를 했다. 종이스키 타기, 손 안 대고 입으로 종이 빨아들이기, 발가락으로 그림 그리기, 동전과 나뭇잎 스크래치, 얼굴에 종이 붙이고 입김 불어 떼기 등등.



발가락으로 그림 그리기
스크래치 놀이
종이가 안 떼어지자, 자지러진다.


이 모든 걸 다 했는데도 1시간밖에 안 지났다.


하아... 우려했던 대로 오늘 밤은 정말 길다.


결국 물감을 발견하고 “엄마, 물감놀이 또 하면 안 돼요?”라고 묻는다. 요새 아이가 자주 쓰는 문형이다. “~하면 안 돼요?”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이 말을 쓰면 나는 그리도 귀엽다. 그래서 또 못 이기는 척 물감을 내주었다.


대신 낮에 했던 것처럼 붓과 물은 쓰지 않고, 데칼코마니를 시도했다. 그래야 바닥이나 벽에 타격이 없으니까. 대신, 물감이 '바닥'을 드러냈다. 있는 힘껏 짜고 또 짜고.


이번에도 ‘~하면 안 돼요?’ 용법으로 내 마음을 만져댄다.

“보라색도 있네. 보라색 한 번 하면 안 돼요?” 이런 식이다. 결국 모든 물감을 한 번씩 다 짜 보고, 이것을 다시 몇 번 반복한 후에야 끝이 났다.


짜고, 짜고, 또 짜고

두세 개 색깔을 짜낸 후, 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문지르며 ‘수리수리 마하수리~ 얍!’하고 주문을 외우니 자기도 따라 한다. 그러고는 그 위에 또 새로운 색깔을 짜내어 '수리수리 마하수리'를 하니 작품은 몇 번이고 변했다. 생각보다 멋진 작품이 나왔다 싶으면 또 짜내서 변화시킨다. 처음엔 두 마리 새였다가 나중엔 나비로 변하고, 처음엔 엄마쭈쭈였다가 나중엔 다람쥐나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는 내내 '이제 그만'을 외쳤지만, 결과물은 꽤나 근사했다.


아이와 엄마는 '데칼코마니'와도 같다.


그러고 나니 드디어 9시.


이제 재워보자, 하다가 나도 같이 잠들어버렸다.     





Epilogue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리면 어쩌나.

막상 제주에 살아보니 이런 일이 잦다고 하신다. 계속된 비에 '더 이상은 못살겠다' 싶으면, 반짝 해가 빛나 준단다.

내가 겪은 제주도 그랬다. 길지 않은 여행 동안 날씨가 꾸물하면 조금은 아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제주를 떠나는 날, 눈물 나게 화창한 햇빛이 내리쬐면서 제주에 '또' 오라고 손짓했었다.

제주는 분명 나쁜 남자 아니면, 새침데기 아가씨일 것 같다.

{오늘의 가계부}
지출 없음.



Today's meal

-조식: 계란국 +간장 두부부침

-중식: 식빵 +우유  

-석식: 3분짜장 +계란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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