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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un 04. 2022

제자리걸음도 지구가 도니까 움직이는 거 맞죠?

정신 승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치얼스!!!

KTX를 타고 울산 교육 연수원에 미술 인문학 강연 가는 길이었다. 휴대전화 진동이 울리고 확인해보니 브런치에서 온 알람이었다. “작가님 글을 못 본 지 무려 300일이 지났어요”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벌써 세 번째 받는 알람이다. 100일째, 200일째도 똑같은 문자를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삼고초려란 말도 있는데, 이쯤 되면 나도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하도 오랜만이라 뭘 쓰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드라마를 쓰고 시나리오를 썼다. (가끔 강연하고) 물론 아직 어디 계약한 것도 없고 진행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직 쓰는 즐거움으로 정신승리하는 중이랄까. 어떤 날은 과정이려니 하며, 그래도 뚜벅뚜벅 나아가는 중이라고 셀프 위안으로 감당이 되는 날도 있고,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영원히 멈춰버릴까 봐 잠 못 드는 밤도 많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잘도 흘렀다. 브런치에 글을 올린 지 300일이 흐를 만큼.   

  

미니시리즈란 게 분량이 있다 보니 쉽게 써지지 않았고, 또 쓰다 보면 스토리가 고갈이나 10부도 채우기가 벅찼다. 그래서 접고, 이래서 접고, 접고 접느라 제자리걸음만 했다.    

 

드라마를 쓰면서 한 달에 한두 번, 쓴 대본을 가지고 드라마 피디와 미팅하고 있다. 대본 분석, 인간에 대한 분석, 상황에 대해 분석하는데, 계속 분석만 하다 보면 내가 누군지, 인간이 뭔지, 애초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뭐였는지 가물가물해진다. 분석하고 수정하고, 분석하고 수정하는 무한 개미지옥에 빠진 기분이다. 그렇게 힘만 들면 안 쓰면 그만인데, 한번 대본에 빠지면 또 그게 그렇게 재밌다. 문제는 나만 재밌다는 게 함정.     


최근 ‘나의 해방 일지’라는 드라마를 봤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다. 1부를 보며 생각했다. 2부에는 뭐가 있겠지. 에이, 설마 3부에는 뭐가 있겠지. 뭐가 없는데 계속 보게 되는 묘한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초반에 그렇게 혼잣말을 많이 했다.

“2회 안에 주인공의 목적이 뚜렷이 나타나야지.”

“뭔 내레이션이 이렇게 많아.”

“드라마의 반이 밥 먹고 출근하고! 그게 뭐야! 지하철이 다했네.”     


그리고 몇 부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큰언니가 한 남자에게 고백하다 까이고 돌아서면서 자작극으로 사고를 위장하는 장면에서 오열했다. 너무 웃겨서 울었다. 그리고 드디어 드라마에 사로잡힌 나를 보았다. 알코올 중독 구 씨도 구찌보다 더 좋았다.      


구 씨에 빠져 그를 추앙하던 어느 날, 그가 주옥같은 대사를 뿜었다. “이 개 같은 X아... 어쩌고 저쩌고.” 호스트바에서 술을 마시고 술값을 내지 않은 백화점 여직원에게 외상값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장면이었다. 이 단 하나의 장면은 나를 구 씨 앓이에서 단칼에 해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수록 난 드라마에서도 해방되었다.     


그런데 구 씨의 저 대사는 내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다. 대본 분석하면서 피디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 “작가님이 쓰고 싶은 이야기보다 시청자가 보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쓰세요!” 난, 분해서 부들부들 떨면서 “작가가 쓰고 싶은 걸 써야지, 어떻게 시청자가 보고 싶은 대본을 씁니까?”     

 

피디님의 깊은 뜻은 입봉도 못한 작가가 작가의 의도를 너무 드러내는 것보다 그들이 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입봉 할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충고였다. 작가님이 쓰고 싶은 이야기는 나중에, 노희경 작가나 박해영 작가 같은 위상이 되었을 때나 가능하다는 첨언과 함께.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구 씨의 대사는 구 씨의 처한 상황과 그가 그렇게 알코올에 찌들어 사는 이유를 보여주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청자인 나는 이 장면이 불편했다. 사정이야 어찌 됐건 저렇게 사는 인간이 1도 멋있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저런 남자를 좋아하는 여주까지 정신 얼빠져 보일 지경이었다. 이러니 시청자의 입장도 중요하겠구나! 싶은 깨달음과 함께 이런 날 보며 떠오르는 말이 있다.   

  

“너나 잘하세요”     


새벽에 눈을 떠 생각해본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시청자가 보고 싶은 이야기면 베스튼데. 최근에 어떤 제작사에서 내 대본을 보고 하는 말. 작가님 글은 재미있는데, 너무 순한 맛이란다. 좀 더 샜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참에 불닭 소스 제대로 뿌려서 눈물 콧물 범벅에 피바다 한번 만들어볼까? 아니야. 그럴 순 없지. 정신 차리자.     


봄이 오나 싶었는데, 여름이 깊어간다. 계절은 잘도 도는데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제자리걸음도 지구가 도니까 앞으로 가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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