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보다 사람들이 더 감동-크로아티아 여행기.
40대 중반이 되어 나와 친구 셋은 더 늦기 전에 자유여행을 가보자며 여행을 계획했다. 패키지여행은 다들 경험이 있었으나 자유여행은 처음이다. 여행사에서 모든 걸 준비해주는 패키지는 맘만 먹으면 훌쩍 다녀올 수 있지만 관광지 도착해서 기념사진만 찍고 이동하니 아쉬움이 크다. 또 그 멀리까지 가서 원치 않은 기념품 숍에 가느라 시간도 낭비해야 하고 뭐라도 팔아줘야 가이드 급여가 생긴다고 하니 안사면 미안함이 들고 사자니 딱히 필요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아 난감하다. 반면에 자유여행은, 숙소뿐 아니라 그날그날 먹을 식사와 가볼만한 곳의 동선을 최소화해서 짜야하고 교통편, 언어 모두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만큼 배우는 것도, 남는 것도 많다. 혼자라면 엄두가 안 났겠지만 아줌마 넷이 모이면 두려울 게 없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크로아티아. 우리나라의 절반 크기에 인구는 5백만이 채 되지 않는 나라. 버나드 쇼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들이 지상의 낙원으로 꼽았던 드브르부니크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당시 ‘꽃보다 누나’가 방송되고 난 후라 그곳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한 탓이기도 했다. 5월부터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10월, 드디어 우리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숙소로 가기 위해 각자 들고 온 28인치 가방을 공항버스에 실었다. 한참 후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전철을 타기 위해 지도를 보며 걷는데, 동양에서 온 아줌마 4명이 자기들 덩치만 한 가방을 끌고 이리저리 길을 찾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어딜 가나 시선이 집중된다. 설레고 또 쑥스러운 얼굴로 목례를 건네는데 전철이 도착했다. 예상과 달리 이곳의 전철은 옛날 기차처럼 출입구가 좁고 계단을 두세 개 올라가야 한다. 무거운 가방을 간신히 들어 올려 먼저 탄 친구가 위에서 끌어주고 아래에 남은 친구가 뒤에서 밀며 가방을 싣고 간신히 올라탔다. 전철 기사도 승객들도 깜짝 놀란 눈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최대한 환한 웃음으로 “하이”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은 미소 띤 얼굴로 조금씩 움직여 우리의 자리를 확보해 주었고 기사는 우리가 자리를 제대로 잡은 걸 확인한 후 출발했다.
각자 가져온 짐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대중교통이 우리나라처럼 발달하지 않아 결국 우린 차를 렌트했다. 혹시 몰라 국제 면허증을 모두 발급받아왔고 모두 운전경력이 10년 이상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 대한민국의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아줌마가 아닌가. 미션 임파서블은 우리를 칭하는 말. 내비가 아무리 영어로 말해도 화면만 보고도 우린 다 알아듣는다. 원하는 목적지에 착착 잘 가나 싶더니 시베닉이라는 구 도시로 접어드니 일방통행이 많고 표지판이 없어 헷갈리기 시작한다.
진입하면 안 되는 방향으로 접어들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주 오는 차와 맞닥뜨린 후 이 길이 일방도로임을 인지한 우리는 차를 돌리기엔 길이 너무 좁아 결국 후진해서 차를 빼야 하는 상황이었다. 길도 좁고 구불구불한 데다 도로 옆 인도의 보도블록이 높아 난코스다. 뒷 자석에 타고 있던 나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마주한 운전자에게 다가가 우리가 관광객임을, 그리고 초행길이라 길을 잘 못 들어왔음을 설명하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조금만 기다려 주면 차를 후진해서 금방 빼겠다고 말했다. 40대 전후로 보이는 남자는 알았다며 괜찮으니 천천히 하라고 말하고는 차에서 내려 뒤에 줄 서있는 차에게 다가다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지나가던 할머니는 기다리는 차들을 향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리쳐 주었다. 그 사이에 운전을 하전 친구가 천천히 차를 후진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오른쪽, 왼쪽 수신호를 보내며 우리가 무사히 후진해서 빠져나올 때까지 우리 차의 뒤를 봐주었다. 더 감동적인 건 모두 미소 띤 얼굴이다. 여러 도시를 도는 동안 이런 일은 서너 번 반복되었고 그럴 때마다 매번 그들은 기다려주고 뒤차들을 정리해주었다. 길을 잘 몰라 서행을 할 때도, 차선을 잘 못 들어 갑자기 끼어들어야 할 때도, 운전을 하는 열흘 동안 경적소리 한번 들어본 적이 없다. 비보호 교차로에서도 마주한 차들은 먼저 가라는 수신호로 항상 양보해준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이 나라는 운전면허 시험에 양보와 배려를 필수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자다르’란 곳에서 노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숙박했다. 두 분은 우리가 주변 길을 물을 때마다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오토바이로 앞장을 섰고 필요한 게 있는지 자주 살펴주었다. 당시만 해도 유명 관광지에 가면 동양인 관광객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어딜 가나 우린 튀었고 우리끼리 사진을 찍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고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지성 팍’ 얘기를 하며 엄지를 세우는 사람이 많다. 박 지성. 나도 ‘모드리치’(크로아티아 출신 축구선수)를 좋아한다고 답하며 ‘엄지 척’을 하면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하고 좋아했다. 역시 축구로 하나 되는 유럽.
여기저기 소도시를 거쳐 꿈에 그리던 ‘아드리아 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에 왔다. 가을이지만 여름 날씨다. 우리 숙소에서 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빨간 지붕의 집들, 민박집주인 할머니는 그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단다. 당당한 체격과 호탕한 웃음을 가진 이 분은 우리가 짐을 나를 때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시더니 아침이면 터키식 커피를 끓여주시며 가보면 좋을 만한 곳을 알려주신다. 우리는 비상식량으로 가져간 ‘즉석비빔밥’을 나눠드렸다. 우린 1층에서 묵었고 그분은 2층에서 살았는데 2층 문은 항상 열려있다. 혼자 사는데 ‘위험하지 않냐’고 물으니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단다. 문을 잠글 필요 없는 도시라니.
코발트 빛 바다와 빨간 지붕 도시와 눈부신 햇빛은 완벽한 3중주를 보여준다. 밤이 되면 신세계가 되는 곳. 구도시 곳곳에 클래식, 재즈. 댄스, 팝등 다양한 공연이 동시에 열린다. 그저 보고 싶은 공연 앞에 멈춰 서거나 근처 카페에 앉아 즐기면 된다. 백열등으로 꽉 찬 올드타운에 음악이 흐르고 낭만이 흐르고 사랑이 흐른다. 그 옛날, 내 돈 떼먹고 도망간 친구까지 다 사랑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궁전 안에서는 그곳 출신 시니어 연주자들이 모여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했다. 마이크 따위는 필요 없이 궁전에 울림 그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환상이었다. 입장료는 단돈 만원.
이 여행을 돌이켜보면 자연과 오래된 도시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배려하고 기다려주고 그럼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얻을 줄 아는 사람들. 손님이 뭔가를 주문할 때도 종업원을 큰소리로 부르거나 재촉하지 않고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눈이 마주치면 손을 든다. 그러면 종업원이 다가와 뭐가 필요한 지 묻는다. 손님만 왕이 아닌 곳. 만약 패키지로 가서 “유명 관광지 찍고 투어”만 했거나 호텔에만 묵었다면 알 수 없었을 그들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이런 감동을 우리나라를 찾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면.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크로아티아 넘 좋아 꼭 가봐”라고 말하듯이 그들도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한국은 정말 좋은 나라야. 꼭 가봐”라고 할 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