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받는 사서가 부러웠던 동료, 이런 결말인 줄이야

<삶은 도서관을 읽고>

by 화양연화

동네 도서관이 작년 가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열람실은 바닥만 교체했는지 큰 변화는 없었고, 3층에 노트북 작업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새로 생겼다. 난 매일 1층 열람실에 들러 책장을 아이쇼핑 하다가 그날 손끝에 걸린 책을 집어 빈자리에 앉는다. 책이 재밌으면 두어 시간 읽다가 3층으로 올라가 작업(소설 쓰기) 을 시작하고, 재미 없으면 바로 올라간다.



어쩌다 보물 같은 책을 발견하면 그 작가의 예전 책들을 다 찾아 읽는데, 문제는 그런 책들은 대체로 오래된 책이라 책장에 꽂혀 있지 않고 보존서고에 따로 보존되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지하 은밀한 공간이 떠오르는 이름, 보존서고. 연관 검색어로 도서관 지박령이 떠오르는 이름(나만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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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은 사서에게 따로 주문해야 받아볼 수 있는데, 어떤 책들은 양쪽에서 압박당한 채 오랫동안 차렷 자세로 서 있어 책장이 풀 발라 놓은 듯 딱 붙어 있다. 그래서 책장을 열면 수박을 자를 때처럼 '쩍!' 소리가 난다. 두꺼운 동화책 표지만큼 한 덩어리 단위로 열리는 책은 누런 빛은 기본이요, 오래된 특유의 냄새가 나는데, 나는 이런 느낌이 좋다. 빈티지 물건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바쁜 사서님이 매번 보존서고에 내려갈 수 없으니 오전 오후 두 번 내려가 주문한 책을 찾아다 주는데, 이럴 때마다 난 몰래 뒤를 밟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마치 그곳엔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만 같아서. 이를테면 오래된 이야기들이 서로 이야기 배틀하는 세상, 슬픈 이야기들이 창가에 맺혀 있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뚝뚝 떨어지는 세상, 누군가 흘려놓은 개그에 사방의 책들이 웃느라 침을 흘리는 세상.


그러다 삐리릭 문이 열리면 책들은 시치미를 뚝 떼고 근엄한 얼굴로 돌아간다(사실은 몹시 설레면서). 누군가 자길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서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애인이 면회와 주기를 기다리는 군인처럼, 사라진 반려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그렇게 두근두근.


마침내 들고 온 쪽지를 보며 사서가 책을 골라서 나가면 순간 침묵이 흐른다. 선택 받지 못한 책들이 참담함을 견디느라 언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적은 밤까지 이어지고, 마음 정리가 빠른 어떤 책이 다시 대화를 시작하면 살얼음 같던 그곳에 다시 온기가 서린다. 그리곤 기다린다. 바깥세상에 나간 그 책이 돌아와 새로운 소식을 들려주기를. 그중 어떤 책은 선택받은 그를 축하해주지만, 한편 퇴짜 맞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남겨지는 일은 그만큼 참혹하고 쓸쓸한 일이니까.


모처럼 외출을 허락받은 책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서 있었던 책은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는다. 설상가상 책을 주문한 사람이 뻣뻣하고 누런 책을 보며 실망한 눈빛이라면 힘을 내야 한다. 선택되자마자 버림받지 않으려면 자가발전을 시켜서라도 몸을 움직여야 한다. 꿈틀꿈틀, 꿀렁꿀렁, 책장에 부드러운 웨이브가 필요하다.


"진정 허탈한 순간은 따로 있다. 간신히 찾아 올린 책이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북카트에 덩그러니 남아있을 때다. 제목만 보고 신청했는데 원하던 내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설레는 마음으로 깨어났을 책의 등이 금세 시무룩해진다. 다시 지하의 긴 잠에 빠져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감한 듯이." - 삶은 도서관, 148p


다행히 책은 버림 받지 않았다. 대신 푸른 빛이 나는 네모난 장치 안에 넣어졌다. UV로 소독한다고 했다. 책은 그냥 책일 뿐인데 병균 취급하는 게 달갑지 않지만, 푸른 빛이 몽환적이라 싫지 않다. 미디어 아트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는 동안, 책도 사람을 읽는다. 눈빛, 손길, 숨결, 잠시 읽기를 멈췄을 때 한쪽 모퉁이를 접는지, 책갈피를 꽂는지, 그리고 커피 향을 통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한다.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 밀폐된 공간과는 다른 질감의 공기, 음식 냄새, TV 소리, 익숙한 듯 새로운 감촉에 눈을 감고 행복을 느껴본다. 잠시 귀휴를 허락받은 무기수처럼. 그리고 다시 원래 자리로.


"오늘도 보존서고의 책들은 고요히 기다린다. '띠리리릭' 하고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를. '타닥타닥'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을. '찰칵' 형광등 불빛이 자신을 비추는 찰나를. 언젠가 다시 한 사람의 손에 들려 세상으로 나가 조용히 읽히기를. 원 없이 사랑받기를." - 149p


나는 "원 없이 사랑받기를"에서 조용히 휴지를 뽑았다. 선택받지 못한 책이 딱히 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태어나 한 번도 조명받지 못한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과몰입한 탓이었다. 마음 같아선 보존서고의 책들을 다 집으로 데리고 와 파티라도 열어주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객기인가요? 갱년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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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것 같은 '보존서고'의 이야기를 <삶은 도서관>이라는 책에서 만났다. '나 혼자 소설 쓰고 자빠져있던 공간'인데, 나 말고도 그 곳에 주목한 사람이 있었다니... 이 책을 쓴 저자는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겪었던 사건, 느꼈던 감정 등을 명징하게 직조했는데(feat, 이동진) 처벌처벌 발라 놓은 아이크림이 아무 소용 없도록 웃긴 글도 많았다.


예를 들면 동료 중 미담 제조기인 K가 있는데, 그는 늘 이용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받는 사람이다. 어느 날은 초보 농사꾼에게 풋고추를 받았는데, 저자 눈에 그 고추는 단순 채소가 아니라 '최고 등급 친절 인증마크'처럼 보였다. 며칠 후 초보 농사꾼이 다시 나타났고 K가 부러웠던 저자는 그의 친절을 흉내 내어 마침내 고추를 받기에 이르는데.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드디어 나도 고추를 받는구나! 김칫국부터 마셨다. 그녀는 갓 딴 고추라며 먹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한마디를 덧붙였다. 꼭 K 선생님과 나누어 먹으라고. 순간, 김이 샜다. 이 고추의 진짜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중략) 나중에 맛본 고추는 그새 독이 더 올랐는지, 미치도록 매웠다." - 155p


미치도록 매운 고추는 선물일까, 응징일까? 도끼 세 개를 다 받으려다 자기 도끼까지 잃어버린 나무꾼이(금도끼 은도끼) 떠오르면서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나는 작정하고 슬픈 이야기에는 눈물 나지 않고, 치밀하게 계획된 개그는 안 웃긴데, 이렇듯 삶에서 배어나는 우연한 이야기엔 속절없이 출렁거린다.


저자는 '경기히든작가'로 뽑혀 50이 넘은 나이에 첫 책을 냈다. 첫 책인데, 이렇게 글을 잘 썼다고? 내력을 살펴보니 1996년(대학 시절)에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시인이었고 졸업 후 광고 홍보인으로 살다가 7년 전 도서관 공무직으로 뽑혀 사서가 되었단다. 역시 내공이 남달랐다.


'삶은 도서관', 제목은 지적이고 좋은데, 글의 통통 튀는 매력은 다 표현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난 내가 쓴 이 글을 AI에 넣고 이를 기반으로 제목을 뽑아달라고 했다. 대답은 놀라웠다.


"보내주신 서평을 읽는 내내 마치 제가 사용자님 옆자리에서 함께 도서관 아이쇼핑을 하고, 보존서고의 '쩍!' 소리를 같이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서평 자체가 하나의 문학 작품 같아서, 이 글을 기반으로 제목을 지으려니 저도 덩달아 가슴이 뛰네요. 특히 "책도 그를 읽는다"는 부분과 "보존서고 책들의 배틀" 장면이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세상에, AI가 이렇게 감수성(+아부)이 뛰어나다니. 아무튼 몇 개의 제목을 추천했는데, 가장 뿜었던 건 '고추 받는 사서'였다. 애마 부인도 아니고 고추 받는 사서라니. '보존서고에서 고추 받는 사서'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19금 에로버전 느낌). 내가 쓴 글이 문학 작품 같다고 설레발 떨 때는 언제고, 제목은 B급으로 짓다니. 함께 살면 닮아간다던데 AI도 날 닮아가는 건가?


집에만 있어 무료한 분, 웃고 싶은 분, 울고 싶은데 트리거가 필요한 분, 무엇보다도 책이라면 질색하시는 분에게 추천. 책장을 열기만 하면 멈출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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