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서 닮은 사람으로, 나와 남편의 상대성 이론.
친구 핸드폰에 박 보검의 환한 얼굴이 뜨더니 박 보검이란 이름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게 모지? 알고 보니 친구의 남편이다. “일단 남편 얼굴보다 보검이 얼굴이 뜨면 보기도 좋잖아. 전화 올 때마다 불쾌지수가 확 줄어.” 천재다. 남편 이름과 사진을 보검이로 저장하다니.
또 다른 친구의 폰에는 남편이 ‘너그러운 남편’으로 저장되어있다. 하도 날카롭고 까칠해서 제발 좀 너그러워지라는 염원을 담아 그렇게 지정했단다. 염원이 이뤄지면 지구 종말이 오는 건지 좀처럼 이뤄지진 않는다.
내 절친의 폰에는 남편 이름 앞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종교의 힘을 빌어야 비로소 극복이 되는 존재인가 보다. 하긴 타인과 오랜 시간을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내 몸을 통과한 자식도, 하늘 같은 부모도, 죽고 못 사는 친구도 며칠만 여행을 가면 싸우고 깨지는 일이 다반사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어두운 얼굴로 출근하는 남편을 보면 맘이 편치 않다. 소보다 많이 먹는 아들 둘과 비싼 것만 쪼금 먹는 아내 먹여 살린다고 밤낮없이 일만 한 죄로 집에서도 소외당하고 tv와 강아지 두 마리가 유일한 그의 친구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는데 만점이네요.’ 그런 비현실적인 사람이 그 사람이다. 그러니 학원을 다녀도 겨우 중간을 유지하는 아들들의 성적이 눈에 찰 리 없다. 평범하고 자유로운 내가 그런 사람과 살고 있다. 그 어려운 걸 내가 23년째 해내는 중이다.
공부는 잘했을지 몰라도 눈치는 별로 없는 남편은 “인간은 두 부류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알고 죽는 사람과 모르고 죽는 사람.” 제발 좀 상대를 봐가면서 상대성 이론을 말하면 좋으련만 시도 때도 없는 상대성이론에 나와 아들들은 더 이상 그를 상대 안 한다. 질려서 우유도 아인슈타인은 안 마신다.
아는 게 많은 건 맞는데 쓸모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죄다 책으로 배운 거라 현실에서는 유용함이 떨어진다. 형광등 하나만 갈라고 해도 두꺼비집을 내리고 고무장갑을 끼고 수선을 피운다. 그가 건강염려증인 건지 내가 안전 불감증인 건지 헷갈린다. 그냥 스위치 끄고 형광등 빼고 새것 끼우면 끝인데 흔들리지도 않는 의자를 붙잡아라, 마라. 형광등을 들고 보조를 해라 마라 세상 번거롭게 한다. 앓느니 죽는다고 내가 하고 말지. 혹시 이거 작전인가.
요즘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빠져 드라마를 다시 보고 책을 다시 읽는다. 조용히 혼자 읽으면 좋으련만 ‘우리말 겨루기’도 아니고 자꾸 퀴즈를 낸다. 행여 내가 맞출까 봐 눈동자가 흔들린다. ‘으이구, 이걸 맞춰 말어.’ 어떻게 하는 게 빨리 마무리 짓는 건지 재빨리 머리를 굴린다. 혼잣말도 많아졌다. 50이 넘으면서 드라마를 좋아한다. 특히 수, 목 미니시리즈. 얼마나 몰입해서 보는지 그 시간에 떠들면 혼난다. 그의 아내로 살아내기란 이렇듯 극한 직업이다. 얼마 전까지도 내가 드라마를 볼 때면 세상 한심한 눈으로 날 보더니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었다. 몇 년 새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거실에 물 마시러 나왔다가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남편의 뒤통수를 보면 맘이 짠하다. 저 인간이 외로워서 저러나 싶어서. 그렇대도 일일이 헤아리고 싶지는 않다. 모두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의 무게가 있는 거니까. 그 무게만큼 깊어질 꺼라 애써 생각한다.
좌 과일, 우 땅콩 사이에 앉아 tv를 보며 행복해하다가 목요일 미니시리즈가 끝나 버리면 한숨을 쉬며 또 1주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투덜거린다. 이런 남편을 위해 드라마 대본을 구상 중이다. 작년 여름, 소설 쓰기 학교를 다녔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주인공을 살려내라고 애원하도록 만들 애절한 스토리에 감동의 극대화를 이끌어 낼 플롯을 짜고 있다. 아이유를 좋아하는 그를 위해 1인 3역으로 캐스팅도 맘속으로 해 놨다. 떡 줄 아이유는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시원하게 한잔. 무심해 보이는 내가 그의 여가까지 신경 쓰는 세심한 아내인 걸 그는 모른다는 게 함정.
그는 반도에 흔한 ‘착한’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이 두 말이 양립 가능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표현하기에는 정확한 말이다. 책임감 강하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한다. 자기가 정한 테두리 안에 자식들과 아내를 넣어두고 보살피고. 아무리 품을 넓혀도 좁다고 아우성치는 가족들 때문에 그도 부대꼈을 거다. 반항을 모르는 그는, 순하게 그의 아버지가 쳐 놓은 테두리 안에서 그렇게 자랐고 그게 최선이라 배웠을 테니. 그런데 울타리를 치는 것보다 신뢰와 존중이 더 큰 힘이라는 걸 그가 배웠더라면.
기준을 세우고 경계를 만드는 일은 그 의도가 교육적이라거나 인간의 도리라거나 하는 걸로 포장이 되지만 결국 사람 사이에도 벽을 세우기도 한다는 걸 그는 몰랐다. 그의 울타리가 견고할수록 가족들과 멀어졌다. 다행스러운 건 오래 같이 살면 서로 닮아간다고 그도 이제 많이 느슨해졌다. 헐거워진 그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아이들을 보며 진작 이랬으면 그도 더 편안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울타리가 누여진 자리에 틈이 생기고 있다. 완벽한 아빠, 진지한 남편보다 농담을 건넬 수 있는 틈이 있어야 한다는 걸 그도 이제 아는 것 같다.
아빠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죄로 사수생 아들은 밥 먹을 때마다 고개를 숙인다. 안타까운 나는 말도 안 되는 유머와 몸 게그를 날려보지만 썰렁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나의 근본 없는 유머가 아니라 그의 격조 높은 위로일 텐데. 나의 눈짓에 시작된 그의 어설픈 위로는 깔때기 이론을 통과하여 다시 상대성이론으로 가고 만다. 참으로 고질병.
그래도 이제는 그런 그를 웃으며 바라볼 수 있다. 사람이 변하는 건 생이 바뀌어야 가능한 법인데 여기까지 온 것만도 참으로 고맙고 다행이다. 그도 그를 버리느라 힘들었을 테니. 생각해보면 미안하게도 나는 나를 버리지 않은 거 같다. 양보하는 듯 유하지만 날 바꾼 적이 없다. 그래서 그가 나를 닮아간다. 그것도 미안하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키운 건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완벽주의 그와 반대로 해야 아이들이 숨을 쉴 수 있을 테니. 상대성 이론이 맞긴 맞다.
서로 뭔가를 일부러 버리지 않아도 편안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마도 곧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