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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ul 24. 2020

동창회의 목적, 그 목적이 아니라니깐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동창을 만나는 이유

지난 주말 서울 사당역 부근 식당에서 중학교 동창회가 있었다. 나는 여수에서 초중을 다녔는데 이번 동창회는 서울과 경기권에 거주하는 친구들 대상이다. 올해로 4년째. 매번 참석은 못하지만 얼굴을 까먹지 않을 정도 참석했다.


남녀공학이었다. 졸업하고 30년이 훌쩍 넘어서 만난 친구들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용케도 서로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하나도 안 변했다고 난리다. 15살에 50살 같아 보였단 말인데 왜들 그렇게 좋아하는지. 나는 무슨 역변의 시간을 거친 건지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특별한 기억이 거의 없다.

민중의 곰팡이와 심마니

 4년 동안 모임을 이끈 회장을 맡고 있는 친구는 인천 경찰서에서 일하는 민중의 지팡이다. 우리 모임에서는 주로 민중의 곰팡이로 불린다. 조폭인지 경찰인지 애매한 외모에 운동을 많이 해서 몸이 울퉁불퉁한 이 친구는 맘속에 소녀가 살고 있다. 그렇게 셀카를 찍어서 올려댄다. 자연스럽고 무심한 듯 격조 높은 사진이 아니고 그냥 얼굴만 크게 나온 영정사진 같은 초상화다. 어쩌다 사진을 클릭하면 깜짝 놀란다. 좀 무섭다.

그래도 공무원이라 그런지 꼼꼼하다. 무슨 회칙이니 뭐니 맨날 뭘 그리 만들어온다. 이번에도 소고기를 앞에 두고 강제퇴출조항을 읊어대는 바람에 배가 고파서 혼났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회장 자리를 넘긴다.

차기 회장은 심마니다. 주중에는 직장을 다니고 주말에는 산삼을 캐러 다닌다. 나는 우리나라에 이렇게 산삼이 많은지 처음 알았다. 몇 백만 원 하는 산삼을 시도 때도 없이 캐더니 이번에는 천만 원을 호가하는 산삼을 캐서 팔았다. 이런 남편은 부인이 얼마나 좋을까. 주중에 출근하고 주말에도 일단 집에서 밥 안 먹고(가장 중요), 산에 다니니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심지어 얼굴도 훈남이다. 장국영 닮았다.

아주 귀여운 여자사람 친구도 있다. 밥보다 술인 이 친구는 30분만 지나도 목소리가 커지고 온 몸이 가을 내장산이다. 울긋불긋하다. 한 시간 쯤 지나면 잠깐 자리보존을 한다. 술을 깨야 또 마시니 축구로 말하자면 하프타임 같은 거다. 누워서도 입은 쉬질 않는다.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풀잎에 맺힌 이슬이 너무 아름다워 "어머 너 진짜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쁘니?"하며 말을 걸었던 이야기며 간밤에 쓴 일기가 너무 명문이라 나중에 다시 보면 정녕 이게 자신이 쓴 글인가 놀란단 이야기, 참 감성도 풍년이다. 근데 너무 귀엽다.

동창회는 불륜의 온상? 여기는 청정지역
                                                                 

 19금의 대명사 영화 <동창회의 목적> 스틸컷

ⓒ 펀펀한영화사


영화 검색창에 동창회란 말을 넣어보면 가관이다. 동창회의 목적, 동창회의 밤, 동창회의 능욕 등등.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제목 뒤에 붙은 '무삭제 감독판' 혹은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이다. 웃겨서 기침 나온다.


동창회가 불륜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근데 우리 동창들은 다들 그냥 인류(Human being)다. 페로몬은 혹시 흘릴까봐 집에 두고 나오나 보다. 뭔 복 없는 사람은 뭔 복도 없다더니 동창 복도 없다.

                                                                         

성공해서 검은 세단 타고 짠하고 나타나서 다이아몬드 카드로 밥도 쏘고, 갑자기 해외에서 바이어한테 전화 와서 영어로 막 쏼라쏼라하고, 마무리로 비서에게 스케줄 확인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 없는 무공해 청정지역.


50된 동창들의 주 대화주제는 주로 자식얘기다. 이번에 무슨 대학을 갔는지, 아들군대 간 이야기, 딸이 남자친구가 있어서 걱정이란 이야기, 또 남자친구가 없어서 걱정이란 이야기. 어려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주도권을 잡고 성인이 되면 좋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목소리가 커진다. 그 이후에는 자식이 잘된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고로 나는 50평생 겸손한 휴머니스트다. 남들에게 위안을 주는 인생.


주로 점심 때 모이는 우리는 밥 먹고 나면 노래방으로 간다. 20~30명되는 인원이 그 곳 빼고는 딱히 갈 데가 없다. 밥만 먹고 헤어지기는 뭔가 아쉽고. 근데 나는 노래방이 에어로빅장 만큼이나 이상하고 어색하다.


스포츠센터에 가면 속이 다 보이는 유리방이 있다. 동네 분들이 그 안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집단으로 배를 튕기고 있다. 밖에서 보면 딴 세상 같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 같기도 하고 집단 최면인가 싶기도 하다.


벌건 대낮에 컴컴한 노래방에 들어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다 나오면 아직도 해가 쨍쨍한데,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갑자기 헤어져서 지하철 타고 혼자 돌아올 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그 민망함은. 또 얼떨결에 흔들어댄 몸동작은 어쩔. 생각만 해도 손이 오그라든다.


술을 한 모금도 못하는 나는 언제부터인가 맨 정신으로 이런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갖가지 핑계를 대고 밥 만 먹고 집에 온다. 그래서 욕은 좀 먹는다. 다행히 욕은 살이 안 찐다.


동창회의 특별함


 혼자여도, 여럿이 있어도 외로운 인생에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게 하는 가뭄 속 단비 같은 그런 존재들.


노래방에 이런 사람 꼭 있다. 억지로 노래 시켜놓고 떠드는 사람, 마이크 잡은 사람보다 더 크게 부르는 사람, 한참 클라이맥스인데 자기 노래하려고 꺼버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애교다. 진짜 나를 충격에 빠뜨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 어떤 모임에서 어떤 남자가 부른 '흥부가 기가 막혀'라는 곡이다. 우리 나이 때쯤이면 누구나 들어봤을 그 노래. 나도 아는 노래기에 박자 맞춰 손뼉을 치고 있었다.


노래가 시작되자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는 그 노래가 아니다. 음정과 박자가 창의적이다. 뇌졸중이 걱정될 만큼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창해서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후렴구에 '흥부가 기가 막혀'가 무한반복 되는데 기가 막힌 건 흥부뿐이 아니었다.


잘 유지가 되는 모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인 역할분담이 수행된다. 정기모임 때마다 그간의 친구들 생일을 파악하고 케이크를 준비해오는 친구. 이 여자사람 친구 별명은 장군인데 모임의 엄마다. 밥 먹을 때도 혹시나 소외되는 친구가 없도록 테이블을 돌며 골고루 말을 섞고, 그때 나눈 대화를 기억했다가 다음에 만날 때 그에 관한 안부를 묻는 세심한 친구.


실없지 않은데 실없는 말만 하고 다녀서 지탄의 대상이지만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남자사람 친구도 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친구의 어마어마한 선행을 알고 있다. 다만 왼손이 알면 안 된다기에 그의 오른손이 한 일을 비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실없는 말로 구박받을 때마다 편들어 주고 싶다.


그리고 설사 못마땅한 게 있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가주는 나머지 친구들. 뒷담화는 뒤에서만 하는 착한 친구들. 서로서로의 경조사를 챙기며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바퀴벌레들.


가족이나 동료, 혹은 근처에 친구가 있음에도,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옛날 친구들을 만나러 멀리까지 가는 이유는 뭘까. 밥만 먹고 살 수도 있지만 라면도 먹고 돈가스도 먹고 싶은 것처럼 그들은 그들대로 이들은 이들대로 의미가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겠지.


어릴 적 원초적 모습을 알기 때문에 가식 없이 만날 수 있는 집합체라는 점이 이 집단이 가진 힘이다. 물론 온전할 순 없겠지만. 그로부터 받는 기쁨이나 위로가 특별하긴 한가 보다. 이렇게 전 국민적으로 활성화가 된 거 보면.


19금 영화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제목 '동창회의 목적'이 그 목적이 아니라 서로서로 위로가 되는 거였음 좋겠다. 혼자여도, 여럿이 있어도 외로운 인생에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게 하는 가뭄 속 단비 같은 그런 존재들 말이다. 다음 모임에는 '흥부가 기가 막혀'를 기가 막히게 불러봐야겠다. 다들 반할 준비 됐나?



추신: 이 글은 코로나 이전에 작성한 글 입니다. #명랑한중년 #웃긴데왜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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