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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ul 27. 2019

피카소가 본 뷔페의 그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연재 '그림의 말들'을 엮은 책 '다락방 미술관'

베르나르 뷔페(1928-1999) 전시에 다녀왔다. 몇 해 전,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베르나르 뷔페 3인 전시가 열렸을 때 그의 실제 작품을 처음 봤었다. 샤갈과 달리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는 피카소의 대항마로 불린 엄청난 화가다. 일단 그의 그림을 한번 보면 눈에 각인이 된다. 그림에 표시된 사인마저도 예술인데, 사인은 그림과 하나가 되어 작품의 품격을 높인다.


그의 그림은 빈 듯 꽉 차 있고 꽉 차 있지만 텅 비어있다. 뷔페는 빈 작품의  여백을  의도와 구도로 꽉 채워 놓았고, 빽빽하게 그려져있는 그림은 그 쓸쓸함과 적막함, 공허함으로 인해 오히려 텅 빈 느낌을 갖게한다.
  
그는 ‘가정은 나 몰라라’ 하는 아버지와 늘 우울했던 엄마, 그 사이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어린 나이에 이미 슬픔과 절친이 되어버린 소년은 파리의 야간 고등학교에서 데생 수업을 받고 15세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한다. 에콜 데 보자르는 어떤 곳인가.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명문 학교, 졸업생 명단을 보면 제리코, 드가, 들라크루아, 프라고나르, 앵그르, 모네, 모로,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등 셀 수없이 많다. 이곳은 단 한 번도 15세 청소년에게 입학을 허락한 적 없는 세계적인 명문 학교이다.

다음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뷔페는 혼자 남겨졌다. 오갈데 없는 소년은 화실에서 누가 쓰다 남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부족한 물감탓에 최대한 얇게 채색하고 그 마저도 칼로 긁어냈다. 그렇게 2년 동안 미친듯이 그림에 몰두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이 엄마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벗어 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9살에 첫 개인전을 열며 파리의 화단은 술렁거렸다. 어떤 이는 그의 그림을 천재 시인 랭보에 비교했고, 또 어떤 이는 시인 로트레아몽과 비교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비평가상’을 수여했다.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예술가들이 즐비한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 상은 그를 단숨에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의 나이 고작 20세였다.
  
그의 어떤 전시회는 전시회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와 폭동에 가까웠다. 그렇게 그는 20대에 부와 명성을 다 차지한다. 성을 소유했고 롤스로이스를 몰았다.
    





닭을 들고 있는 여인(베르나르 뷔페, 1947,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 예술의 전당


이 그림은 뷔페가 19살에 그린 ‘닭을 들고 있는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비쩍 마르고 길게 늘여 놓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그림이 발표되었을 때 파리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다들 자기가 모델인 줄 알았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는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배급을 타기 위한 줄이 이어지고 난방이 이뤄지지 않는 겨울에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몸을 붙이고 추위를 견딜 정도였다. 그러니 이 그림은 어떤 과장도 없이 현실이었다. 그를 가리켜 20세기 파리의 산증인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뷔페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피카소와 뷔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뷔페는 뜨는 별, 피카소는 지는 별로. 어떤 비평가는 피카소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했다. 입체파나 야수파, 어떤 거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새로운 뷔페의 열풍이 불었다. 이에 당시 60대 후반이었던 피카소는 자존심이 상하고 또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20살에 비평가상을 받고 세상은 이토록 난리인지.
  
뷔페의 전시에 피카소가 왔다. 피카소는 전시장에 들어서자 아무 그림도 둘러 보지 않고 곧바로 이 그림 앞으로 직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그림 앞에 서 있다가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다. 그리고 어떤 언급도 없었다. 피카소는 이 그림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질문이 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며 이 그림 앞에 관람자들을 멈추게 만든다. 피카소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는 방식이 작품 단 하나면 충분했던 것’인지 단지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서인지 당사자가 눈을 감은 마당에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일화는 결과적으로 이 그림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뷔페의 생애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지고지순한 평생 ‘온리 원’ 사랑, 명성의 추락,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음에 좌절한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전시 후기도 아니고 ‘그림의 말들’ 에필로그도 아닌데 말이 길어졌다. 이렇듯 전시를 보고 나면 생각이 많아지고 할 말도 많아진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게 ‘그림의 말들’ 이다. 그동안 일 년 반을 연재하면서 나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알고있는 것과 글을 쓰는것은 또 다른 문제여서, 작가 한 명에 대해 글을 쓰고 나면, 어떨 땐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무당이 접신을 하듯 나도 그 사람의 인생에 깊숙이 들어가서 그가 되면서 빠져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배우가 어떤 역할에 깊이 빠졌다가 나오면 현실로 돌아오기가 힘들다고 하는 말은 진짜였다. 프리다 칼로가 그랬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렘브란트, 나혜석이 그랬다.
  
몇 차례 타인이 되는 경험을 하고 나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인간의 결은 그 밑에 숨겨진 사건과 환경, 타고난 성품 등 다양한 기반에 근거하기 때문에 단숨에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숙과 파멸의 경계를 확인하면서 성숙의 길을 택하는 게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게 했다. 또, 사회적 규범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내가 진정 욕망하는 지점은 무엇일까에 대한 많은 질문이 내 안에서 쏟아졌다.
    



                                                다락방 미술관(문하연,)ⓒ 문하연, 도서출판 평단


그렇게 많은 불면의 시간을 거쳐 쓴 글들이 책이 되었다. 글을 연재하면서 많은 메일을 받았다. 책으로 나오면 꼭 연락을 달라는 고마운 메일들이었다. 그런데 내 실수로 받은 메일들이 다 지워졌다. 일일이 출간 소식을 알려드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게 돼버렸다. 너무나 죄송스럽다.

  
며칠 전,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보았다. 화면에 있었던 글이 종이에 찍히면서 다른 감성이 묻어 나오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이게 종이의 힘인가.
  
“미술이 이렇게 재미있었어?”
"왜 우리가 학교 다닐땐 이런 걸 말해주는 선생님이 없었을까?, 그랬다면 이 재미있는 것을 더 빨리 알고 즐길수 있었을 텐데."
  
이 책을 읽은 멀리 있는 내 친구가 보내온 문자다. 부디 모두에게 그렇게 읽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락방 미술

참고서적- 이 글은 베르나르 뷔페 전시도록(예술의 전당)과 도슨트를 참고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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