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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Oct 03. 2019

공간의 위로인가. 공감의 위로인가.

길상사에서..

9월의 끝, 희뿌연 공기를 가르며 성북동 자락에 있는 길상사에 다녀왔다. 여름 같은 가을날이었다. 법정 스님이 기거했던 그 툇마루에 앉았다. 그 옆 마당, 한편에 내 한숨을, 내 소란스러움을 꺼내어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리고 싶었다. 감정의 고려장.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못하도록.     


툇마루에 앉아 낱낱의 나뭇잎 위로 부서지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부지런히 사람들이 들어오고 분주히 사람들이 나갔다. 눈을 감으니 바람 소리, 사람들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 인연들이 얽혀 신음하는 소리, 안내판을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 소리, 청설모가 나무를 오르는 소리가 섞여 울려 퍼졌다. 현기증이 났다.   

   

옆을 보니 공책이 한 권 놓여있다. ‘스님께 하고 싶은 말’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뭐라도 쓰는 건 나의 일상. 공책을 들어 무릎에 올리고 펜을 들었다. 내 앞에 다녀간 누군가의 마음이 내 눈을 붙잡았다. 그 페이지에는 어느 아버지가 쓴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쾌유는 바라는 마음이 절절히 들어있었다. 그 앞장에는 방황하는 자식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번뇌를 떨쳐내러 왔다는 청년의 마음이,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는 괴로운 마음을 잘라버리고 싶은 어느 사람의 고군분투도 담겨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한 권을 다 읽었다.     


각자가 내려놓은 삶의 무게와 내 안의 소란이 얽혀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혹부리 영감처럼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셈이다. 새로 붙은 혹의 무게 때문인지, 내 안의 소란스러움은 잠시 침묵했다. 다시 빈 페이지로 돌아와 펜을 드는데, 누군가 말을 붙였다. “저기요, 다 쓰셨으면 제가 써도 될까요?” 아, 네 하면서 공책을 내미는데 그분과 눈이 찰나에 스쳤다. 나이 지긋하신 그분은 울어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보고 당황하시더니 뜬금없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신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공책을 건네고 그 처소를 빠져나와 길상사를 한 바퀴 삥 돌았다.

      

울고 났더니 우습게도 배가 고팠다. 이 배고픔은 실로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지. 공양간으로 슬슬 걸어갔다.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배식이 끝났다고 했다. 아쉽게 돌아서는 나를 보살님이 붙잡는다. 배식은 끝났지만 일하신 분들 먹으려고 밥을 비비고 있는데 한 그릇 줄 테니 먹고 가라셨다. 아마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삐쩍 마른 내가 안쓰러운 신 모양이다. 보살님이 주신 비빔밥을 맛있게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햇반 하나로 하루를 먹는 내가 먹기에는 엄청난 양이었지만 웬일인지 다 들어갔다. 앞으로 3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이 든든해지니 마음도 더 좋아졌다.     


한적한 벤치에 앉아 들고 간 텀블러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행복하다. 뜬금없이 이건 또 뭔가. 공간이 주는 위로인가, 공감이 주는 위로인가. 나를 억누르던 그 무언가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날 만큼 하찮았다. 큰 숨을 반복해서 내쉬며 구겨진 마음을 쫙 펴고, 눅눅해진 가슴을 가을 햇살에 뽀송하게 말렸다.   

   

나는 지금 내 운명을 바꿔 놓을지도 모르는 큰 파도 앞에 서 있다. 저 큰 파도에 몸을 던지고, 그 파도를 타고 가서, 저 파도를 넘어야 하는데…. 두렵다. 넘지 못하고 빠질까 두렵고, 부딪혀야 하는 그 파도의 위력을 감히 알지 못해 두렵다. 그 너머에는 뭐가 있을지. 무엇보다도 나를 망설이게 만드는 것은 그 파도를 넘기 위해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무겁게 주렁주렁 달고는 그 파도를 넘을 수 없기에. 하지만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쥐고 있는 것을 놓기에는 또 얼마나 많은 부대낌이 생기는지. 욕심과 욕망이 꿈틀대는 아래에 불안의 강이 흐르고 있다. 지금 삶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그만둘까 하는 마음과 끝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충돌해 소란스럽다.   

   

모든 게 사람의 일이고, 나도 사람인데, 하지 못할 일은 무엇이며 못한다 한들 그게 뭐. 실패만큼 훌륭한 경험은 없다는데.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주문을 건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다. 되고 안 되고는 나의 영역이 아니다. 나는 오직 최선을 다할 뿐이다.” 슬금슬금 걷다 보니 다시 제자리, 그 툇마루다.    

  

세 시가 넘어지니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한가했다. 공책을 집어 들었다. 그 사이 공책은 그 페이지 그대로 있었다. 내게서 공책을 받아가신 그분도 아무 말도 적지 않으셨나 보다. 자세히 보니 얼룩이 져 있다. 내 눈물 자국이었다. 이미 썼구나! 나는 그냥 그대로 공책을 덮고 그렇게 내 마음을 그곳에 두고 나왔다.   

  

주차장으로 와서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When October goes를 크게 틀고 북악 스카이웨이를 한 바퀴 돌았다. 머릿속이 정돈되면서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스물스물 올라왔다. 이제 방황 끝. 도전 시작. 흔들리는 나를 응원하듯 가을 햇빛이 노랗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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