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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Mar 26. 2020

모임은 못 나가고...마스크 없이 속내를 털어놓는 법.

코로나에 잠식되지 않기 위한 나만의 노력.

동네 로컬푸드에서는 인근에서 농사지은 농작물과 과일, 식자재 등을 판매한다. 이곳 농작물에는 딸기 앞에 현빈, 대파 앞에 아이유, 이런 식으로 농사지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자신이 만든 뭔가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책임감을 불러온다. 그래선지 작물들이 좋다.  

    

남자 셋과 내가 사는 우리 집에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냉장고에는 버뮤다 삼각지대가 있다. 날마다 장을 산더미처럼 보는데 눈만 뜨면 사라지고 없다. 더 황당한 것은 아무도 먹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서로 안 먹었다고 티격태격하는데, 묶음으로 사다 놓은 아이스크림이나 요구르트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완전 범죄를 위해서 껍데기까지 먹어버리는 것인지 껍데기조차 없다. 그러니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그래서 막판에 범인으로 몰리는 이는 우리 집 강아지 미미다. 미미로써는 억울할 노릇이지만, 집안의 평화를 위해 미미가 먹은 거로 마무리 짓는다. (미미 미안, 책 많이 팔리면 CCTV 달아 네 억울함을 풀어줄게.)     



        꽃을 꽂으니... 이제야 미소가 번진다




3월이 되면서 로컬푸드에 화초가 나오기 시작했다. 노란 프리지아 몇 단을 샀다. 꽃을 들고 집에 오는데, 찌그러진 마음이 다 환해졌다. 동네 단골 가게 언니에게 들러 한 다발을 내밀었다. 비혼인 언니는 몇 년 만에 처음 받아 보는 꽃이라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뜨뜻한 보람 같은 것이 목까지 올라왔다. 한편으론 몇 년 만에 받아 본다는 꽃을 자체 발광 리정혁 동지가 아닌, 후줄근한 나로부터 받게 만든 것이 내심 미안했다.   

  

집에 들어오니 내 손만 기다리고 있던 두 아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먹지도 못할 것만 사 왔다는 표정이다. 스무 살이 넘은 아들 둘은 준법정신이 강해도 너무 강하다. 아예 집 밖을 나가질 않는다. 지들이 먹을 장이라도 보면 좋을 텐데,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한다는 미명 아래 나만 부려 먹는다. 그래도 큰아들은 분리수거나 음식물 쓰레기는 버리러 나갔다가 오는데, 둘째 아들의 이동 경로는 자기 방과 주방뿐이다. 밥 먹을 때만 나온다. 이 고독한 청년의 가사 임무가 설거지라 더 그런가?    

 

예쁜 화병에 꽃을 꽂으니 절로 미소가 번졌다. 잠시라도 이 행복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어 꽃병을 내 방으로 들고 와 책상에 올리고 문을 닫았다. 좁은 방안이 금세 향기로 가득 찼다.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이 어찌나 싱그러운지 이제 막 세수한 어린아이 얼굴 같았다. 내 방에 온 이 반가운 ‘손님’에게 노란 조명을 켜주고 잔잔한 음악도 틀어주었다. 그리고 나도 노란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이렇게 있으니 그 유명한 식물원 ‘가든스 바이 더 베이’가 부럽지 않았다. 단돈 만 원에 이렇게 행복하구나.   

   

아침마다 물을 갈아주고 햇빛을 쐬어주니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시간마다 새롭게 얼굴을 내미는 이 노란 손님들에게 나는 바짝 얼굴을 대고 통성명을 했다. 그리고 주저리주저리 말을 걸었다. 이제 곧 새로 나올 책 제목을 뭐로 할까? 라고 물어봤더니, ‘죽고 싶지만, 프리지아는 보고 싶어’ 란다. 이거 표절 아니야? 좀 참신한 거 없어? 했더니, 당황했는지 노란 얼굴이 더 노래졌다. 내가 좀 심한 거 같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큰아들이 문을 벌컥 열며 “엄마, 누구랑 말해?” 한다. 깜짝 놀란 나도 얼굴이 노래졌다. 이 나이가 되면 자꾸 식물하고 말을 하게 된다는 걸 아들이 알 리가 없다.  

   

꽃이 만개했다. 혼자 보기 아까워 친한 친구들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다들 이쁘다며 당장 꽃 사러 간다고 한다. 날마다 어두운 뉴스로 마음이 힘들었는데, 잠시나마 이 노란 손님으로 여러 사람 위로받은 거 같아 내 마음도 좋았다. 그런데, 만개한 화병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에 물을 갈아줬는데, 물도 혼탁했다. 꽃을 꺼내 흐르는 물에 하나하나 대를 닦고 새 물을 화병에 채웠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물밑에서는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있었다.  

   

피는 속도보다 지는 속도는 더 빨랐다. 하루에 두 번 물을 갈아 주었지만, 시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핀다’지만, 또 오는 봄이 이 봄이 아니듯 또 피는 꽃도 이 꽃이 아니다. 그러니 시들어가는 꽃을 보며 담담하기가 힘든 것이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심신이 미약해진 탓인지 시들어가는 저 손님이 왠지 나인 것만 같아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한 시절 찬란히 피고 가는 저 손님에게 만나서 반가웠다고, 덕분에 행복했다고 기꺼이 손을 흔들어야 할 터이지만, 미련하게도 미련이 많은 나는, 미련 없이 저 프리지아를 보내지는 못하겠다. 냄새나는 물을 버리고 꽃을 마르게 두었다. 이미 말라버린 그가 인제 그만 저를 놓아달라는 듯 고개를 숙이고 날 더는 쳐다보지 않는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시든 꽃은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려야 한다. 열흘이 넘게 바짝 붙어, 마스크 없이 속내를 털어놓은 사인데, 쓰레기 봉지에 꾸겨 넣어야 한다니. 신문지에 싼 프리지아를 차마 어쩌지 못하고, 아들에게 버려달라 부탁했다. 아들은 신문지 뭉치를 종량제 봉투에 밀어 넣고, 버리고 오겠다며 나갔다.      


                                                                          


잘, 이별하는 일


이별에 아무리 아파도 사람은 사랑할 때의 설렘으로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지난 아픔은 잊히고, 새살이 돋고. 그래야 또 우린 멀쩡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렇게 돌고 도는 인생에서 내가 제대로 기억해야 할 것은, 잘 작별하는 일. 사랑할 때 아낌없이 사랑하고, 작별의 시기가 오면 손을 흔들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기를. 오는 봄이 자연스럽듯이 지는 꽃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이별에 무감각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뜨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손을 흔드는 존재가 되고 싶다.  

   

첨부터 없을 땐 몰랐는데, 프리지아가 사라진 자리는 삭막했다. 확실히 난 자리는 표가 났다.  

    

또다시 먹을 것이 감쪽같이 사라진 버뮤다 삼각지대를 채우기 위해 다시 로컬푸드에 갔다. 보라색 프리지아가 나와 있었다. 신기해서 한참을 보았다. 사람은 첫사랑과 비슷한 사람을 반복해서 계속 만났다고, 결국 나도 다시 노란 프리지아를 샀다. 우리 사이 추억도 있으니,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화병에 물을 채우고 프리지아를 꽂았다. 그리고 ‘봄’이란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책상에 올리고 마주 앉아 말을 걸어본다.     


 “안녕, 봄!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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