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누나가 모은 LP 음반 중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듣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건 누나가 죽은 뒤였다. (중략) 살아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려 한 한 인간의 선택에 대해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누나의 외로움을 나는 지금도 상상할 수 없다. 누나는 내게 음악을 남겨주고 떠났다.
(중략) 그런데, 이 곡의 제목이 운명이라니! 누나의 운명, 나의 운명. 인간의 운명이란 게 도대체 뭘까. (중략) 빰빰빰빰~ 이 처절한 외침은 인생이 엄숙하다고 내게 얘기하고 있었다. (p115~117)
모차르트와 사랑에 빠진 것은 분명했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베토벤을 숭배하는 내가 모차르트를 사랑한다는 게 왠지 부도덕하게 느껴졌다. 모차르트는 인생의 고뇌를 모르는 작곡가로만 보였고 달콤한 그의 음악에 마음을 맡긴다는 것은 베토벤에 대한 배신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중략) 당시 대학생이던 형은 내게 저 하늘의 별처럼 드높은 지성인이었다. 모차르트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고백할 사람은 형뿐이었다. 그런데, 내 표현은 이랬다. "모차르트 음악은 거지 같아!" 어떤 여자애를 좋아하면서 그 마음을 숨기려고 "그 애는 못생겼어!"라고 둘러대는 사춘기 꼬마의 치기였다. 형의 대답은 이랬다. "거지 같은 것도 못 만드는 주제에 웬 건방진 소리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p147~148)
"이 곡을 연주하다가 트레몰로 소리가 이빨 빠진 듯 덜덜거려서 쫄딱 망했던 기억이 난다. 같은 무대에서 훗날 록밴드 '마그마'의 리드싱어가 되는 조하문이 비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를 멋지게 불렀는데, 그가 열렬한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면, 나는 뜨거운 위로의 박수를 받았다." (p199~200)
"나 자신이 상처를 입고 나니 다른 이들의 상처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치유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그 시간, 정작 위로받은 이는 나 자신이었다." (p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