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티게 하는 기억들.
80년대 광주는 사계절이 뜨거웠다. 최루탄은 초봄의 황사처럼 늘 공기를 꽉 채우고 있었고 우리는 슬픔인지 매움인지 모를 눈물을 달고 살았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절, 광주시내 한 복판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진압대로부터 도망 온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도피처가 되면서 조퇴와 휴교를 반복했다. 조퇴를 한들 사방이 통제되어 집까지 돌아 돌아 걸어 도착하면 밤이 되었다. 교복 자율화로 사복을 입었던 우리는 대학생들과 섞여있으면 구별이 되지 않아 다짜고짜 잡혀 갔다. 진압대가 보이면 숨어야 했고 남들이 뛰면 뛰어야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딱히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막연히 대학생이 되면 대학가요제 같은 곳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성적도 외모도 성격도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소풍이나 수학여행 가서 무대가 생기면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앞으로 나갔다. 뭘 하겠다고 주변에 말한 적 없으니 모두가 뜨악해했으나 나도 뭘 하리라고 맘먹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다짜고짜 노래했고 이후 소녀들로부터 각종 선물과 편지를 받았다. 아쉽게도 여고에는 소년이 없다.
광주의 5월. 운동권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 공기 속에 살고 있었고 개인적인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날도 집회를 계획하는 인파를 뚫고 교문을 빠져나오는데 유독 눈에 띄는 대자보가 보였다. ‘캠퍼스 송 경연대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듯이 진압 버스로 둘러싸인 대학에도 축제는 왔다. 나는 홀리듯이 신청서를 냈다. 학기 초라 모든 게 낯설고 친구도 별로 없었던 나는 ‘축제의 꽃, 캠퍼스 송 경연대회’에 나 홀로 참가했다.
도착해 보니 솔로는 거의 없다. 다들 동아리에서 삼삼오오 민중가요를 창작했거나 기존 민중가요를 아카펠라나 사물놀이와 협연으로 편곡해서 준비해왔다. 내 손에는 내가 직접 녹음한 조잡한 반주(전주나 간주는 크게 틀어서 녹음하고 노래 부분은 최대한 줄여서 녹음한)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만 덜렁 있었다. 포기하고 갈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이것도 못하면 가요제는 영영 못 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노래 한곡 한 들 기억도 못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버티던 중 내 차례가 왔다.
진행 요원에게 테이프를 건네고 반주가 나오길 기다렸다. 대강당을 꽉 채운 인파가 악기 하나 없이 혼자 나온 여학생에게 집중되며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웃음이 나왔다. 아마 어색해서 그런 거 같은데 내가 웃으니 관객도 웃었다. 30년이 지났지만 나는 그때 ‘그 순간’이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선명하다. 나는 노래를 불렀고 노래가 끝이 났다. 끝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드는 순간 내 귀가 먹먹했다. 어디서 전쟁이 난 줄 알았다. 함성과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인기상을 받았고 압도적인 남학생들의 지지에 힘입어 대상과 함께 앙코르 노래를 했다. 축제마저 비장했던 그 시절 그 비장함을 무장해제시킨 곡은 19살 여학생이 부른 심수봉의 ‘그대와 탱고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미친 듯.
다음 날 나는 학교에 스타가 되어있었다. 민중가요나 이문세 노래에 내 노래가 섞여 점심시간에 흘러나왔다. 같은 과 친구들은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떠는데 나는 ‘가수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아니 왜 내가 부를 때 들리는 목소리랑 녹음된 목소리는 이렇게 다르지?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법학과 다닌다는 그는 내 공연을 봤다며 커피 한잔 하고 싶단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른스럽게 행동하느라 진땀이 났다. 그렇게 찾아온 그는 이후 매일 찾아왔다. “이 여자가 내 여자다”라는 대자보가 교문 앞에 일주일에 두 번은 붙었고 만나주지 않자 집 앞에서, 학교에서 자해소동까지 벌리는 게 다반사였다. 달콤 꽁냥 샤방샤방한 멜로를 꿈꿨던 나는 이후 졸업할 때까지 추격 액션 공포 스릴러물을 찍었다. 가요제는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했으니, 꿈은 물 건너갔다.
졸업 후 친구와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는 수술실에서, 나는 응급실에서 일했다. 23금 격정 멜로를 찍어보겠다는 꿈은 고된 노동 앞에서 또다시 좌절되었다. 쉬어도 몽롱한 3교대 근무와 해도 해도 쌓이는 일. 찢어진 환자 꿰매고 나면 약물중독 환자. 그를 위세척하고 나면 교통사고 환자. 아무리 뛰어다녀도 느리다. 몸이 여기저기 부딪혀 멍드는 건 예삿일. 메디컬 드라마에 나오는 러브라인은 다 헛소리다. 우리는 매일 ‘닥터 잡’, ‘널스 잡’을 나눠서 ‘침범했네 안 했네’ 따위로 얼굴을 붉히고, 서로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해 웃겨도 화를 냈다. 경력이 짧은 간호사들은 명절이나 연말 회식 때 일을 해야 했으므로 4년이 지난 후에 나는 처음으로 연말 단체회식에 갔다.
유흥주점을 통째로 빌려 근무자들을 뺀 병원장 이하 직원들이 모였다. 부서별로 테이블에 둥그렇게 앉았다. 식전 행사가 끝나고 장기자랑을 했다. 1등 한 팀은 상금 30만 원. 테이블마다 누가 대표로 나갈지 정하느라 웅성거렸다. 몇몇 팀들은 무대를 중심으로 삥 둘러서서 합창을 했다. 팀을 병풍처럼 세우고 혼자서 돌고래 초음파 같은 고음을 질러대는 선수도 있다. 나는 닥치고 솔로다. 평소에 밝고 상냥하긴 했지만 술도 못 마시고 끼를 본 적이 없어 벙쩌하는 응급실 선배님들께 저 돈을 따다 드리겠노라 약속했다.
발목에 무리가 갈 수 있는 하이힐을 벗고 묶었던 머릴 풀었다. 밴드 마스터에게 내가 부를 곡을 알려준 뒤 무대 중앙에 선 나는 음악이 나오기도 전에 정체모를 웨이브를 시작했다. 조명은 나를 취하게 하고 성실함은 타인을 기쁘게 한다. 박수를 쳐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린 순수한 영혼들이 허공을 떠다녔다.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 노래가 끝났을 때 나는 우리 팀 테이블 위에 있었고, 손에 든 맥주는 어디에 뿌렸는지 빈 병이다. 문화충격을 받은 병원장은 정신이 혼미해져서 상금을 올려 50만 원을 내게 주었다.
업무에 복귀한 나는 이후 세 명의 직원으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그중 가장 불쌍해 보이고, 나 아니면 구제해 줄 사람 없을 것 같은 인간의 손을 잡았다. 나는 나이팅게일이니까.
무대 1막이 끝나고 나니 묵직한 삶의 2막이 이어진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아들도 둘을 낳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 동시에 매일이 생소한 날의 연장이다. 아이들이 어리면 어린 대로, 크면 큰대로 그 덩치만큼 문제의 크기도 커진다. 산 넘어 산이라고 그렇게 산을 넘다 보니 아이들도 성인이 되고 내 나이도 오십이 다 되어간다. 생각이란 걸 할 겨를도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던 지난한 시간들이 23년 훌쩍 지났다. 안타깝게도 2막 삶의 무대는 중앙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숨이 턱까지 차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초라한 날이면 이 기억들을 꺼내와 그 마음에 연고처럼 바른다. 누구나 자기를 버티게 하는 기억 한 자락.
유난한 날이면 하늘을 보며 ‘하쿠나 마타타’ 주문을 건다. 그리고 감히 다시 화양연화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