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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an 07. 2019

엄마, 우린 OO이라 안돼요

호모 모방 쿠스, 아들과 나.

30년 전, 부모님은 여수에 야산을 사서 중턱에 전원주택을 지었다. 아빠가 당시 레미콘 사업을 하고 있어 시멘트가 남아돌았는지 아주 크게 지었다. 손자 손녀들 놀러 오면 쓰라고 마당에 작은 수영장도 만들었다, 말이 수영장이지 그냥 땅을 깊게 파서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어다 받았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비버리힐스가 부럽지 않은 곳이었는데 벌써 오래전이라 지금은 여기저기 다 부서지고 흉물스럽다. 마당에 큰 개 ‘춘향이’가 있는데 지금은 춘향이 용품들이 쌓인 창고가 되어있다.

     

방도 일곱 개다. 근데 쓸 만한 방은 하나도 없다. 시멘트는 많고 철근은 부족했는지 온 집이 균열이다. 비가 오면 받혀야 하는 대야가 열 곳은 되는 것 같다. 몸이 불편한 엄마와 이제는 늙고 약해진 아빠가 사는 이 집이 관리가 잘 될 리 없다. 빈방 4개는 거미줄이 가득해 귀신 나오게 생겼고 겨울이면 균열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방안에서도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다. 물론 안방과 작은 방 2개는 빼고. 이들 방은 나머지 방으로 둘러싸여 있어 다행히 따습다. 화장실이 외부와 맞닿아있어 얼마나 추운지 밤에 쉬라도 한번 하면 잠이 확 달아난다.

     

이렇게 불편 덩어리인 우리 집이 웬일인지 내 아들들에게는 꿈의 장소다. 늘 친정집에 가고 싶어 안달이다. 컴퓨터도 없고 주변에 집도 없이 적막한데 아이들은 그곳을 좋아한다. 마음이 편안하단다. 엄마가 아프기 전, 그러니까 20년 전까지는 깨끗하고 나름 럭셔리한 집이었는데 엄마가 아프고 난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부모님이 이 집을 고수하는 이유는 하나다. 휠체어를 타는 엄마. 거실 겸 마루가 너무 넓어 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않지만 그 넓은 덕에 전동휠체어를 타고 왔다 갔다만 해도 하루가 답답하지 않다. 해가 없을 땐 냉기가 돌지만 통유리로 되어있어 해만 뜨면 온실이다. 넓은 거실 통유리 앞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앉아있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삼 년 터울의 두 아들들은 어쩌다 보니 얼마 전 수능을 ‘같이’ 치렀다. 대학 원서접수도 끝나서 부모님께 얼굴을 보여 드리러 아이들과 함께 여수에 내려갔다. 집도 부모님도 일 년 사이 더 노쇠해있었다. 먹을 것을 잔뜩 사다 놓으신 아빠는 볼 일이 있다고 외출을 하셨다. 장거리 여행이라 피곤한 나는 커피를 들고 마루로 나와 바다를 향해 의자에 앉았다. 엄마는 전동휠체어를 끌고 와 내 옆에 앉는다. 햇빛에 반사된 물빛이 눈이 부시다. 아이들이 이동식 침대인 라꾸라꾸 침대를 끌고 와서 그 옆으로 나란히 눕는다. 

     

중풍 때문에 오른쪽이 마비되고 말이 어둔한 엄마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한다. 잘 지냈는지, 별일 없었는지 묻는 내게 엄마는 “그냥 그래”가 모든 답변이다. 나는 엄마가 웃는 게 좋다. 불편한 몸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엄마가 날마다 웃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뜬금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엄마는 내 손을 끌어다 자기 마비된 손 위에 얹어놓고 성한 손으로 한없이 만지작거린다. 그런 엄마를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백내장이 와서 눈빛도 혼탁했다. 게다가 얼굴도 반은 마비라 엄마의 입가에 침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아무리 그렇게 음흉한 눈으로 군침을 흘려도 우린 근친이라 안돼요. 다음 생을 기약하세요.” 엄마는 숨넘어가게 웃느라 침을 더 흘렸다. 나는 아무리 군침을 덩어리로 흘려도 어림없다고 못을 박고 저녁 밥하러 부엌으로 갔다. 라꾸라꾸 침대에서 휴대폰을 보던 큰 아들이 키득거렸다.

     

엄마는 내가 어딜 가든 따라온다. 주방으로, 거실로, 심지어 화장실 앞까지. 한참을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나를 보더니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리고는 베개를 휠체어에 싣고 나타났다. 아, 엄마는 또. 


마비된 손으로 베개를 누르고 성한 손으로 간신히 지퍼를 열어 봉투를 꺼낸다. 내가 도리도리 하고 계속 상추만 씻자 엄마는 애가 탔다. 아빠가 오기 전에 빨리 이 봉투를 내게 전달해야 하는데 내가 도리질만 치고 있으니. 

     

“엄마, 내가 엄마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아요. 내 걱정 마시고 그 돈으로 엄마 맛있는 것 사드세요. 이왕 줄 거면 집문서 같은 걸 주던지.” 엄마는 또 웃는다. 결국 나는 그 돈을 받았다. 국민연금에 장애연금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엄마의 돈을. 참으로 불효자다. 울어야 한다. 불효자는 웁니다. 그 돈은 돌고 돌아 울 아버지의 주머니로 들어가니 아버지가 울어야 하나?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안방으로 왔더니 몸살 기운이 있는 작은 아들은 그새 잠이 들었다. 엄마와 큰 아들은 귤을 까먹으면서 아이패드로 동영상을 보고 있다. 뭔가 보니 개그맨이 짜장면을 먹는 먹방이다. 소고기에 밥을 네 그릇이나 먹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대단한 내 아들. 그런데 엄마는 신기한 듯 재미있어했다. 귤을 먹다가 과즙을 흘리는 할머니 입가를 휴지로 무심히 닦아주는 아들을 보니 저렇게 많이 먹는 돼지라도 참 좋았다.      

나는 아들 뒤에서 그 크고 넓은 등을 껴안으며 말했다. “엄마 손 시려, 주방 보일러가 안 되는지 완전 추워.” 아들은 차가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근친이라 안돼요. 다음 생을 기약해요.” 


이놈의 시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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