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의 인연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주중이나 주말이나, 항상 늦은 시간에 귀가를 하셨다.
일 때문이기도 했고, 친구분들을 만나거나 당신의 취미활동을 하시느라 늘 분주하고 바쁘신 분이었다.
주말이면 언제나 엄마와 시간을 보냈던 오빠들과 나.
아버지 없는 하늘 아래 우리끼리, 우리만의 시간을 보냈던 그때 그 시절.
그 시절에도 가뭄에 콩 나듯, 아주 가끔 아버지와 함께 한 기억이 있었으니.
그중에서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건, 사진 찍는 아버지의 모습.
내가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사진에 빠지신 게.
아버진 상당히 고가(高價)의 카메라를 사들이기 시작하셨고, 매달 정기구독하시는 사진잡지가 안방에, 서재에 쌓여갔다.
아버지가 야외로 나가 사진을 찍는, 즉 ‘출사’를 나가실 때, 막내 오빠와 나를 함께 데리고 가신 적이 있었다. 아주 드문 일이긴 했지만, 그 기억은 참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버지가 사진기를 들고 숲을 헤매며 '학' 사진을 찍으러 다니실 때, 오빠와 난 학똥을 맞을까 봐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아버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었다.
학이 놀라 날아가면 안 되었기에, 아버지의 수신호에 따라 우린 풀숲에 가만히 숨죽이며 앉아있기도, 강아지처럼 살금살금 학 근처로 다가가기도 했었다.
이 곳 브런치에서 사진을 잘 찍으시는 작가님들의 '작품 수준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그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학 사진 찍기에 몰두한 젊은 시절 아버지의 뒷모습과 옆모습, 높은 나무 사이사이에 고운 자태로 앉아있던 새하얀 학들, 눈이 시리게 푸르렀던 그때 그 날의 하늘과 맑은 공기, 나무와 풀 냄새까지.
추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장면이 갑자기 문득 떠올라, 급작스레 아련해지는 마음.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적절한 단어를 생각해내느라 고민하고 있을 때, 영화 ‘About Time'에서 시간여행을 하게 된 아들이 그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단순히 ‘그리움’이라 표현하기엔 부족한 느낌.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너무 멀리 와 버린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아버지와 함께 한 순간에 대해 느끼는 ‘먹먹함.’
가슴속으로 휑한 바람이 파고들어 심장을 한 바퀴 돌고 휘리릭 내 몸을 빠져나가는 느낌.
시리면서도 아리고 또 아련한, 텅 빈 듯한 허전함까지.
온갖 감정이 뒤섞이고 얽혀, 뭐라 설명하기 곤란한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선, 이 야심한 밤에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내일 아침엔 아버지께 전화 한통 드려야겠단 생각과 함께.
'자비의 칼날'님의 조언대로, 아침에 아버지께 안부전화를 드리며 '학' 사진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일터에 걸어놓으신 그 옛날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셨다.
내 기억 속 아버지의 '학' 사진과 보내주신 사진이 크게 다르지 않아, 사진을 보던 그 순간, 나는 시간이동을 하여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한 기억을 떠올리고 추억할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했다.
잊고 살아도, 한번씩 이렇게 그리울 때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찾아뵙고 인사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항상 건강하시길, 좀 더 곁에 머물러주시길 기도하는 이 아침, 전화통화를 마무리하며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