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nChoi 11시간전

여신

  서양문화사 수업의 수강신청 전쟁에서 승리한 대학 첫 학기 때 일이다. 첫 수업에 강의실을 찾아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강의실 문을 여니 계단식 강의실에 백 명도 넘는 학생들이 출입문을 바라보며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앉을자리를 둘러보는데 배우와 아이돌 사이 어디쯤 있는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남학생의 꼭뒤를 지켜볼 수 있는 2 계단 뒤 10시 방향 정도에 자리에 잡았다. 학생들은 대개 첫날 앉은자리를 한 학기 내내 고수한다. 나도 그럴 작정이었다.


  나는 매번 수업 시간에 그 남학생의 시선을 흘깃 한 번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를 고심했다. 강의실 문 멀찍이에 서성이다가 교수가 들어오기 직전에 시침 뚝 따고 강의실에 들어가는 호기도 부렸다. 하지만 벚꽃이 흐드러지게 날리고 중간고사가 시작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남학생은 수업이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휘리릭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조별 발표과제에 그가 발표를 맡았다. <역사의 여신과 미디어의 여신>이라는 제목이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소개하며 여인의 이목구비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전체가 파마머리 비슷하게 울퉁불퉁 고불고불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을 뿐 얼굴이 없었다.      


  이어 한국의 울산 신암리에서 나온 신석기시대 자그마한 여인상의 일부를 설명했다. 지리산에 자리한 여신상인 이른바 성모상(聖母像)도 산을 유람한 선비가 남긴 글을 통해 소개했다.      


"성모의 사당에 이르렀다. 세 칸짜리 판잣집이다. 성모상은 돌로 만든 신상인데 이마에 흠이 있다. 이는 (중간생략)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왔다가 그 석상을 찍어 놓고 간 것을 뒷사람이 다시 붙여 놓은 것이다."     


  그의 발표 요지는 문화사에 등장한 여인상은 우리 어머니나 큰 이모 같다고 했다. 지리산 성모상은 다소곳하게 앉은 모습이 할머니처럼도 여겨진다.


  그는 오늘날 미디어에서 칭해지는 여신은 외모가 특별한 여성의 모습에 적용된다고 하였다. 생명, 풍요, 친근함과 달리 외모가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 이후 등장한 미인상에 사용된다고 했다. 그래서 미디어에 등장하는 여신이라는 이미지, 관용어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말을 맺었다.      


  나는 열심히 메모를 하면서 그의 생각에 끄덕끄덕하였다. 조별 발표가 이루어지면 교수는 <준비, 내용, 발표> 등 몇 가지 항목을 설정해서 각각 점수를 매기고 총평을 하게 하였다. 나는 발표자가 특히 발표를 조리 있게 잘했다고 특이사항까지 써넣었다.       


  수업을 마치고 처음으로 말을 나눌 기회가 왔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나오는데 그 남학생이 옆으로 지나갔다.

  “발표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다였다.     


 점심을 먹으러 옆자리 친구와 학생식당으로 갔다. 오늘 발표한 조에 속하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발표한 그 남학생 바로 옆에 모르는 얼굴의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다들 쾌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 여학생은 무심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더 무심한 얼굴로 그 남학생 앞에 놓인 김밥과 떡볶이를 자기 접시로 덜어다 먹었다. 늘 언제나 그런 것처럼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서로의 음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은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실루엣만 어릿한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모든 동학들은 어떤 일들을 지나 살포시 내려앉은 흰머리를 바라보고 있을까. 2024가 아직도 낯설기만 한 숫자인데, 2025가 벌써 밀고 들어온다. 얼굴이 적당히 묘사된 고대의 여신상처럼 모두 엇비슷한 모양새로 세월을 흘러가는 기분이다.


※ 인용문 출처 :『청장관전서』69,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下), 두류산(지리산) 유람기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