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아래에서 외친 웅녀
웅녀는 우리 역사의 시작을 여는 자리에 고뇌하던 청춘으로 등장한다. 단군신화에 여자가 된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어 늘 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화하여 혼인하니 (웅녀가) 아이를 잉태하고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원 끝에 얻은 아들인 단군은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으며, 1908세에 신선이 되었다.
웅녀가 왜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혼인을 주선해 줄 부모나 돌봐주는 어른이 있었을 리 없는 처지였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철저히 혼자였지만 박달나무를 찾아가 그 아래에서 매일 빌었다. 아마 무릎을 꿇거나 엎드렸을 터이고, 눈물 콧물까지 쏟았을 것이다.
이런 그녀를 보고, 그녀의 비는 소리를 들어주는 이가 있었다. 소원을 들어준 이는 환웅이었지만, 이미 동네방네에도 소문이 퍼졌을지 모른다. 그녀가 자기 본거지였던 동굴에 틀어박혀 기도했다면, 아마 혼자 지쳐 스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웅녀는 산 정상의 큰 나무 아래라는 공개된 장소로 나왔다. 그리고 (아마도 목청껏 소리 내어) 매일매일 기도했다. 결국 웅녀는 그녀가 빌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들을 둔 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웅녀의 경우처럼 소원 성취를 이루어 줄 은인과 기회를 만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성장할 때만 해도 동네와 친인척이 있었고, 그저 대문 열고 들어가면 만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관계가 때로 밀가루 떡반죽처럼 너무 엉겨있어서 문제가 일기도 했다. 지금은 ‘우리’는 뒤로 밀려나고, ‘나’라는 단어가 화두가 된 세상이 되었고, 인간관계는 모래알처럼 되었다. 한 움큼 쥐어 보아도, 손가락 사이로 술술 다 빠져나가 버린다.
호랑이나 스라소니처럼 자연에서 의연히 혼자 살아가는 동물을 보면 뭉클하다. 하지만 인간의 생존방식은 그렇지 않다.
‘나’를 강조하는 분위기는 곧 네 삶의 무게도 오롯이 너 혼자 책임지고 걸으라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하지만 우리 삶의 여정은 어떠한가. 마냥 걷기 괜찮은 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그렇게 의연한 존재도 못 된다. 천둥 치고, 번개가 때리는 억수 같은 비를 만나는, 궂은날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그 길을 혼자서 걸으려 하면 그만 지쳐 주저앉아 버리기 십상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쓰레기 집에 사는 2030 청년들이 빠르게 늘어났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그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마음이 참 아팠다. 찬란한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닫힌 문과 막힌 벽 안에서 혼자 외롭고 아파하고, 마침내 무기력에 빠져 기운을 놓고 있었다.
동굴에서 나온 웅녀처럼 공개적으로 소리 내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환웅처럼 인생의 대박을 불러줄 사람은 못 만나도, 그렇게 외치다 보면 어느 사이에 변한 자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무도, 풀도, 다람쥐도 듣지만, 내 말은 누구보다 내가 듣는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은 문제해결의 첫걸음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동시에 내가 걸어갈 때, 누군가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다면 걸음을 멈추고 다가 보는 따듯함을 지닌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려 한다. 한국 사람은 몇 다리만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라고들 한다. 나를 둘러싼 주변의 몇 다리까지 살피는 일이 어느 시대보다 중요한 세상임을 느낀다. 웅녀를 딱히 여긴 환웅의 마음이 우리 유전자에 있으리라 믿어본다.
<그래 걷자>
비는 그친다지만
맞아야 할 비라면
처절하게 맞을게요.
언젠가
햇살이 다시 비치면
흐린 그날을 떠올리며
신발끈을 다시
단단히 묶을게요.
그림출처 : 최선혜, 『슬픔도 미움도 아픔도 오후엔 갤 거야』, 흐름, 2020, 1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