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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May 24. 2021

책 - 정신, 사상, 그리고 영혼을 담은 그릇

어린 시절의 우리 집에는 책이 제법 있었다고 기억된다. 일종의 필수 서적이던 백과사전, 단편문학전집을 비롯해 엄마가 한 권 두 권 사 주신 '세계 어린이 명작' 정도에 해당하는 단행본도 있었다. 〈소년 007〉이라는 연재만화가 기다려지는 《소년동아일보》라는 신문은 날짜에 따라 차곡차곡 철해져 있었고, 《소년세계》, 《소년중앙》 등의 월간잡지도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정리한 손길의 주인공이신 할머니는 유달리 책을 소중히 여겨 절대로 친구들에게 빌려주지 못하게 하셨다. 빠듯한 수입을 십 원 단위로 쪼개어 알뜰히 살아야 하는 규모였지만,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엄마는 기꺼이 지출 항목에 ‘도서구입’을 할당해 주셨다.


그 뒤로도 내 주변은 언제나 공간에 비해 책이 많았다. 건축을 전공한 남편은 아파트를 지을 때 하중(무게)을 고려해 설계하는데, 우리 아파트는 일반 주거공간이 아니라 도서관의 하중과 맞먹어 조만간 벽에 ‘크랙’이 갈 거라고 엄포(?)를 놓곤 하였다. 집을 방문한 사람은 한결같이 저 책을 다 읽었냐고 내게 묻곤 하였다. 최근 신상의 변동과 함께 많은 책을 정리하여 책꽂이를 비워 내었다. 그런데 아들이 나의 뒤를 이어받아, 다시 생활공간을 책에게 내어주고 있다.  


책의 역사는 대략 2000년 전으로 어림잡는다. 고대는 ‘책’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형식이겠지만, 그 주된 재료와 형태가 무엇이건 그 안에는 문자나 활자 이상이 담겨있다.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한 세상을 열어 보여주는 책이라는 창문, 얼마나 위대한가! 책은 아는 만큼 읽히고, 사색하는 만큼 세상을 보여준다. 인류 역사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온 다양한 발명이 있지만, 책은 그 몇 천 년에 이르는 시간 내내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1814~1888)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틈틈이 써 두었던 기록을 책으로 모은 《임하필기》가 있다. 관련 연구자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자료로 이용되는 중요한 책인데,  책이 갖는 영향력에 관한 글 한 자락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여러 학문의 시초〉라는 제목이다.


《일본서기》에 이르기를, “진나라 태시 7년(271), 왜 응신 2년에 백제 왕이 ‘진손’을 보내어 일본에 들어가 ‘태자사’가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서적을 전해 주어 유학이 일어났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에는, “진나라 태강 5년(284), 왜 응신 15년에 백제 사신 왕인이 《천자문》을 가지고 오니, 이에 유교가 처음으로 행해졌다.” 하였다.


양나라 승성 원년(552), 왜 흠명 13년에 백제 성명왕이 사신을 보내어 석가상과 《번개경론》을 바쳤다. (중략) 이것이 불교 사원의 시작이다.


수나라 대업 6년(610), 왜 추고 18년에 고구려의 담징이 왔는데, 담징은 유학의 경전에 정통하고 단청에 솜씨가 있었으며, 또 종이와 먹 및 맷돌을 만들 줄 알았으니, 이것이 종이와 맷돌을 만든 시작이다.



백제에서 전해진 서적은 일본에 유학, 불교라는 세상을 열어 주었다. 이 글에는 이어서 백제 사람으로 일본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친 미마지(612), 긴 다리를 놓는 기술을 가르친 ‘번’, 그림을 가르친 ‘하성’ 등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예를 들면, 조선 후기에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생긴 것도 ‘책’ 때문이었다. 유학자들이 중국을 오가면서 서양의 천문, 지리, 과학 등을 비롯한 서적을 들여와 읽고 토론하는 가운데 천주교 관련 서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부나 선교사가 조선 땅에 온 일도 전혀 없는데, 책을 읽고 천주교를 자신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죽임을 당할지언정 천주교를 배교할 수 없다며 칼 아래 스러진 사람 가운데 이름이 확인되는 사람만도 2천 명에 가깝다.


목숨을 건 믿음이라는 다소 극단적 예이지만, 인간의 역사에 책을 통한 변화는 무수히 일어났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책은 글자로 쓰여 있지만, 사람은 그 글자를 읽으며 정신이 달라지고, 사상을 배우고, 어쩌면 영혼도 깨어난다. 그것은 글자에 정신이 담겨 있고, 사상이 스며있고, 영혼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 개인에게도 코페루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준 책을 들라 한다면 저마다 한 두 권씩 있으리라 본다.


※ 제목의 사진은 조선의 책거리(병풍).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작품, 112×381㎝, 개인 소장. 예술의 전당 제공. 요즘 표현으로 하면 서재 그림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출간된 조선시대 책거리에 관한 책으로는 국내외에 흩어진 900점에 가까운 책거리를 망라한 정병모, 《책거리:세계를 담은 조선의 정물화》, 2020, 다할미디어가 있다.

http://m.gjnews.com/view.php?idx=68050

※ 인용 소개한 자료는《임하필기》11,  한국고전번역원DB(역자 심우섭).

※ 백제의 책이 전해진 기록이 실린《일본서기》는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680년경에 시작하여 720년에 완성).《화한삼재도회》는 1712경 출판된 일본의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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