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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May 30. 2021

신발을 거꾸로 신고

- 그리움과 반가움 -

내가 국민학생일 때, 할머니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나이셨다. 그 시절 나의 눈에는 왜 집안에서 할머니와 엄마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집안 어딘가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무언가 하고 계셨지만, 지금 생각하면 눈을 뜨고도 그 수고로움을 보는 눈은 어찌 그리 없었는지 모른다. 그저 나에게는 먹을 것이 뚝딱 나오고, 깨끗해진 옷이 뚝딱 준비되어 있고... 그랬다.


그렇지만 귀에는 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야말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거의 모든 훈육의 말씀이었다.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도 무사할 수 없었다.  아침에 학교를 가려하면, 그 전날 생각 없이 벗어던졌던 신발이 가지런히 현관에 놓여 있곤 하였다. 신발을 정리하면서 내게 하시는 할머니의 말씀은 늘 같았다.


"도둑이 들어오다 그 집 현관에 신발이 가지런하게 놓였으면 그냥 돌아가는 법이다."

"신발 놓인 모양새는 그 사람의 정신이다."


나는 할머니의 이른바 온갖 ‘밥상머리 교육’에 순응 거부를 혼재하며 성장하였다. 신발 교육은 어느새 순응으로 흘러갔다. 그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잠자기 전에 현관에 나가 식구들의 신발도 정리하곤 한다.


조선의 신발은 지금처럼 좌우를 구분해 만들지 않았다. 가죽신, 비단신, 나막신 등이 있었지만, 좌우의 구분이 없어 착용한 뒤에 점차 구분되는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


두 신발이 같은 모양이었다면, 어릴 때 툭하면 좌우를 바꿔 신어 꾸지람 듣는 일은 없었을 듯하다. 그런데 좌우를 바꿔 신는 일은 실수지만, 거꾸로 신는 일은 다른 이야기이다.


반가운 손님 오신다고 아침부터 까치 소리

신발 거꾸로 신고 맞으니 몸에서 병도 사라졌다

최립(1539~1612),《간이집》7,


신 거꾸로 신고 나와 반겨준 다정한 마음에

흉금을 털어놓고 다시 술잔을 잡았노라

오늘 밤 달빛은 어슴푸레한데

작년에 핀 매화 떨어지려 한다  

신익성(1588~1644), 《낙전당집》2


영북이라 머나먼 삼천리 길을

추위 무릅쓰고 애써 찾아왔구나

인기척에 놀라 신발 거꾸로 신고 나가

두 손을 부여잡고 말없이 잠잠했지

이현일(1627~1704),《갈암집》1



까치 소리에 아침부터 마음이 들떴는데, 기다리는 손님이 오자 신발까지 거꾸로 신은 채 달려 나갔다. 반가움에 병마저 사라진 것 같이 여겨진다. 나의 방문을 맞아 신을 거꾸로 신은 채 서둘러 나와 반겨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울까.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술잔을 기울이며 흉금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추위도 마다하지 않고 머나먼 길을 벗이 찾아왔다. 인기척을 듣자마자 신발을 제대로 신을 경황도 없이 나가 맞이하여 두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신을 거꾸로 신는다’(倒屣)는 말은 '손님을 맞을 때 급하게 나가느라 미처 바로 신지 못함'을 이른다. 거꾸로 신은지도 모른 채 달려 나가 맞이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런 방문을 받는 일은 얼마나 인생의 큰 행복인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한 걸음에 달려 나가고 싶다. 두 손을 부여잡고, 흉금을 털어놓으며, 혹시라도 아픈 곳이 있어도 씻은 듯이 나은 것처럼 행복한 날을 맞고 싶다. 살면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그런 벗이고, 우리 모두가 그런 아름다운 날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 제목의 사진은 비단과 가죽으로 제작된 영친왕비의 당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https://www.gogung.go.kr/searchView.do?cultureSeq=919LJE

세간에 알려진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이야기는 ‘고무신’이 나온 근대 이후에 생겨난 말이 아닐까 한다.


※ 일부만 인용한 시문의  시 제목은 각각 다음과 같다. 출처는 한국고전번역원 DB.

《간이집》7, 〈동지 황경미 영사에게 사례함〉,

《낙전당집》2, 〈죽음(竹陰)조희일 공 에게 부치다〉

《갈암집》1, 〈고향으로 돌아가는 김태보 이현을 보내며〉


※  옛 신발에 대해서는 조선희, 신발,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참조.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7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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