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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May 08. 2021

은비녀와 상투의 무게

- 어버이를 기리며 -

평생 쪽머리를 하셨던 나의 외할머니는 아침이면 참빗으로 머리를 빚어내려 쪽을 지으시고 은비녀를 꽂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그럴 때면 할머니 옆에 앉아 희고 자그마한 은비녀를 만지작거리며 양 갈래 머리이던 내 머리에 꽂아보곤 하였다. 할머니는 처녀는 은비녀 꽂는 게 아니라 하시며, 이다음에 결혼하면 준다고 하셨다. 


조선 시대에 쪽진 머리는 결혼한 여자의 상징이었으며, 은비녀로 장식하였다. 혼인한 남자는 상투를 틀었다. 전통 시대에 혼인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은 대개 엄격히 복장으로 구별을 두었다. 사실 조선만이 아니라 근대 이전 거의 모든 사회에서, 특히 여자는 혼인 여부가 복식으로 구분되었다. 


흙바닥에 낭군과 함께 명주 이불 덮고 잤어라 

삼일 동안 농막에서 유숙한 인연이 끝났네 

이별한 뒤엔 옆집에서 비웃거나 말거나

비파소리에 슬픔으로 목메어 하룻밤이 일 년 같아라

(중략)

어느 때나 내 손으로 은비녀 집어 꽂고서 

흰 수염 어루만지며 같이 누각 기대볼거나 

 (《점필재집》 4, 시)


시의 화자는 은비녀의 주인공이다. 관직으로 인해 떨어져 지내는 지아비에 대한 참으로 낭만적인 그리움을 노래하였다. 곱게 쪽진 머리를 은비녀로 장식하고, 서방님의 수염을 만지며  함께 누각으로 나들이 가는 상상을 하며 그리움을 달래는 여인이 그려진다. 


은비녀만 남기고 간 가여운 여인의 이야기도 있다. 


(유효금이)일찍이 구월산에 유람하는데 길에서 큰 호랑이가 앞을 막으며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리는데, 흰 물건이 입 안에 가로 걸려 있었다. 

유효금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해치지 않으면 내가 꺼내 주겠다.” 하니, 범이 머리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시늉을 하므로 곧 꺼내니 그것은 은비녀였다.

그날 밤에 범이 와서 이르기를, “나는 산의 정령이다. 어제 성당리에 가서 어떤 여인을 잡아먹다가 물건이 목에 걸려서 매우 괴로웠는데 공이 나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공의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재상이 되리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2권 / 황해도(黃海道) 문화현(文化縣)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설화이므로 그 형성 시기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다. 고려를 세운 공신 유차달의 아들 유효금(柳孝金)에 얽힌 설화인데, 출처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전해진다. 위 인용문에 따르면 성당리에서 호랑이에게 목숨을 뺏긴 이는 비녀를 지른 여자였다. 누군가의 지어미이며 아마도 어머니기도 했을 여인은 은비녀만을 남긴 채 희생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아내이며 어머니임을 겉으로 드러내 표시하는 문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버이로 감당하는 그 무게는 여전하다. 은비녀의 무게는 온 세상의 무게, 당신 생명 자체의 무게이지만 기꺼이 사랑으로 지고 가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무게이다. 틀어 올린 상투의 무게도 마찬가지이다. 걸어가는 뒷모습의 어깨에서까지 느껴지는 무게이다. 곱게 빗어 지은 쪽에 찔러 넣은 은비녀, 틀어 올려 고정시킨 상투의 무게는 그렇게 어버이로서 삶 자체의 무게이며, 생명의 무게이다.  


※ 상투는 혼인만이 아니라 관례를 치른 뒤에도 틀었다. 또한 혼인한 것처럼 보이려고 혼인 절차를 밟지 않고 튼 ‘건 상투’라는 것도 있었다.

※ 인용한 《점필재집》에 수록된 시는 〈미인을 대신하여 세 번에게 화답하다〉(代美人和世蕃)는 제목으로 한국고전번역원 DB(임정기 번역)를 참고했으나, 서술의 편의상 필자가 알기 쉽게 풀어썼다. 

※ 조선시대 지방관은 연고지가 아닌 지역에 혼자 부임해야 하였다. 지방관이 가족과 함께 머물면 지방민에게 부담을 주기 마련이고, 지역 백성을 돌보는 데 전념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 글 제목 그림은 김득신(1754~1822)의 <자리짜기>(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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