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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May 02. 2021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허탄함

- 소식을 나누는 행복을 위해 -

인편으로 서신이나 안부를 전하던 시절, 소식을 나누지 못해 애타는 심정은 까치만 울어도 동구 밖에 나가볼 지경이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소식을 나누는 수단이 다양하고 편리해졌다. 그렇지만 기다리는 소식이 없을 때, 그 애타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경중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지 싶다.


안동을 본관으로 한 사대부로 재능이 뛰어났지만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여 평생 벼슬을 거부하고 뛰어난 작품을 남긴 시인 권필(權韠, 1569~1612)이 있다. 그가 <인일(人日)에 홀로 술을 마시며>라는 제목으로 남긴 시의 일부이다.


누가 시를 지어 초가지붕 이 작은 집에 부쳐올까

나 홀로 술동이 열고 처량함을 원망해 본다

봄이 왔건만 고향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고

버들빛 매화만 속절없는 단장의 슬픔이노라

(권필, 《석주집》 별집 1)


겨울이면 사람이 오가기 어려웠으므로 술동이로 처량함을 달래며 봄을 기다렸다. 드디어 인편으로 소식이 올 수 있는 봄이 찾아왔지만, 당최 무소식이니 애만 더욱 타들어 간다. 권필은 술로 낙을 삼으며, 시로 권세가를 공격하고, 조정과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거침없게 살던 문인이며 시인이었지만, 무소식은 그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한 번 작별한 후 소식이 없으니

그리운 마음 안개에 막혔어라

어찌하면 축지법을 써서

그대 사는 곳에 가 반가이 만날까

(이산해, 《아계유고》 4)


유학자는 도술이나 술법을 부정하였지만, 무소식에 답답하니 축지법이라도 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학식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기다리는 소식이 없음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구순을 앞둔 내 어머니의 한 친구는 결혼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담배 사러 나간 남편이 평생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아들 하나를 두고 평범하게 살던 분이었다. 그 뒤로 '주민등록 일제정리기간'이 돌아올 때마다 혹시 무슨 단서라도 찾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셨다. 어느 날 아무런 흔적도 없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소식이 끊어진 남편, 이 친구 분은 끝내 이사도 못 가고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사셨다. 가끔 어머니는 그 친구 이야기를 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극단적 사례이지만 때로 무소식은 그렇게 잔인하다. 무소식은 그런 ‘단장의 슬픔’이다. 길던, 짧던, 또는 영원하든 무소식은 속절없이 애를 끓이며 세월을 감내하는 시련이다.


최근 신상의 변동을 비롯해 여러 이유로 전화기에서 이름을 정리하였다.  많지 않지만 여전히 새로 등록하는 번호가 생긴다. 핸드폰을 사용하게 된 이래 몇 번이나 전화기를 바꾸어도 변함없이 남아 있는 이름도 있다. 현재 소식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데  남겨 둔 번호도 있다.


소식이 오가지 않고 있는 사이,  내 삶에 적어도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의미를 지닌 사람이 ‘희소식’과는 전혀 다른 상황일 수 있다.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참으로 미안한 상황에 처해 있을 수 있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거나, 외로워하고 있을 수 있다. 딱히 기다린 것은 아니라도 나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누가 남을까... 더 시간이 지나면... 누구와 여전히 소식을 주고받고 있을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은 다양해졌는데 오히려 마음을 전하는 데 인색해진 것이 아닌지 옛 선현의 시를 읽으며 생각에 잠겨본다. 지금 소식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은 지금 이 시간의 삶에 가장 소중한 이들이리라. 코비드가 안개처럼 가로막혀 있어도, 축지법은 없지만, 마음 담은 소식을 전해보려 한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의 소식을 받는다면 참으로 행복한 날이 될 것 같다.


<물방울처럼 사라진 뒤>


그 소식 찾아

오늘도 걷는 꿈길

걸으면서 지은 미소

깨어나면

눈가에 눈물 한 방울


글/그림  Seon Choi


※ ‘인일’(人日)은 음력 1월 7일로 사람의 몸을 소중하게 여겨 근신하는 날이다. 질병을 예방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날이며,  가무와 음주를 즐기기도 하였다. 대체로 비슷하지만 지역별로 서로 다른 특징도 보인다. 지금은 특별한 행사나 의례가 남아있지 않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세시풍속사전의 <사람날> 참조.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4098

※《석주집》(1631년)의 저자 권필의 시를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허균은 극찬한 평이 있다. 그는 권필의 시를 ‘화장도 하지 않은 절세의 미인이 구름도 가던 길을 멈출 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등불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곡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일어나 가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며, 시의 아름다움과 여운을 높이 평가하였다.

※ 《아계유고》(鵝溪遺稿)는 조선시대 영의정에 오른 문신 이산해(1539~1609)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59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 인용한 시의 출처는 한국고전번역원 DB. 한글 번역은 필자가 조금 쉽게 풀어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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