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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Apr 20. 2021

매정한 세월, 다정한 사람

찬란하지만 아직 뜨겁지는 않은 봄 햇살이 집안으로 찾아든다. 오전 내내 머물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가버리면, 등을 따스하게 해 주는 오후 햇살을 만나러 밖으로 나간다. 언제 나아질지 모르는 상황에 사람들은 지쳐 가는데, 계절은 정확하게 때를 따라 자기 몫을 하고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흙바닥에 물가를 끼고도는 산책길에 와 닿는 세상은 생명의 환희로 들썩이는 무르익은 봄이다. 참으로 정확하게 때를 지키는 세월은 어쩌면 그리도 매정한지... 인간의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는다.


머뭇머뭇 거닐고 배회하며 편히 오래 쉬었도다.

돌연히 겨울과 봄이 지나가 버렸다.

그때그때 음양 변화의 모양을 보소서!

가는 세월 사람에게 매정하기 그지없도다.

(《농암집》1)


조선 후기 대사간에 오른 문신이며 학자인 김창협(1651~1708)이 시에서 피력한 심경이다.

사람은 때로 머뭇거리고, 배회하며, 쉬기도 하지만 세월은 가차 없는 완벽함으로  자신의 때에 맞춰 움직인다. 그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흐름이 사람에게는 참 매정하다.


꿈속의 구름산은 숨어서 살 만한데

거울 속의 흰머리는 매정하게 불어나네

(《상촌선생집》14)


부쩍 늘어나는 흰머리를 시에서 술회한 이는 관직이 영의정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학문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조선의 문신 신흠(1566~1628)이다. 관직이 높건, 학문이 뛰어나건 상관없이 매정하게 늘어나는 흰머리, 어찌 그리 예외가 없는지.


매정한 세월만큼이나 매정하게 거론한 존재가 있다. 이른바 염라대왕이다.


일찍부터 두터운 교분을 맺고

나이도 잊은 채 정답게 보낸 세월

흉허물 없이 터놓고 지내면서

야멸찬 세상맛은 또 얼마나 맛봤던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홀연히 자취 감추다니

염라대왕 어찌 그리 매정도 한가

(《계곡선생집》 제29권)


조선 후기 문신 장유(1587~1638)가 세상을 떠난 벗 윤경윤을 기리며 쓴 ‘만시’(挽詩)의 일부이다. 세상사의 고락을 함께 하며 정답게 지낸 이가 홀연히 이 땅을 떠나갔다. 참으로 야속한 ‘염라대왕’이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은 매정한 세월과 냉정한 염라대왕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 매정함을 감당하게 해 주는 힘은 가질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신흠이 덕을 지닌 군자로 칭송한 김후라는 인물이 있다.  


(김후는)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 기개가 있고 엄정하며 꼿꼿하되 매정하지 않았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남의 과실을 용납하지 않는 등 의기가 헌걸차서 사람들이 그를 바라볼 때 단번에 대장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상촌선생집》26권, 김후 묘비명)


김후는 기개가 있고 엄격하고 정확하며 꼿꼿한 성품이지만 매정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쉽게 표현하면 무척이나 깐깐했지만 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절도가 있지만, 그 모든 원칙보다 다정함을 가진 덕을 지닌 군자였다.


 유한한 인간에게 정확하게 흘러가는 세월은 참으로 매정하며, ‘염라대왕의 부름’은 어떤 생명에게든 추호의 예외 없이 공평하게 냉정하다. 아무리 속 깊은 다정함이 있더라도, 그 문제를 없애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네의 다정함은 그 문제를 견디어 내고,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피할 수 없는데 부담이 되고 괴로운 일, 세간의 말처럼 그것을 즐기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다만 피할 수 없더라도 감당할 능력을 갖고 싶다.

우리의 정, 그것도 풍성한 정은 걸음걸음 때로 무겁고, 더러는 지치고, 가끔은 포기하고 싶을지라도 기꺼이 이 삶을 감당하며 걷게 해 준다. 그러니 참 다정한 사람으로 살아봐야겠다.


다정하게.......


※ 인용한 원문의 출처는 한국고전번역원 DB. 서술의 편의상 필자가 보다 쉽게 풀어썼다.

※《상촌선생집》26권, <김후 묘비명>의 원제목은 <정략장군 행 충무위 부사과 김군 묘갈명>(定略將軍行忠武徫副司果金君墓碣銘) 병서


글/그림 Se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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