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으로 수족냉증. 손이 차가우면 마음이 따뜻하다는 오랫동안 떠도는 구전 덕분에 그럭저럭 큰 문제는 아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손발이 차가우면 임신이 어렵다는 또 다른 구전 때문이다. 보약을 먹어보자. 잉어를 달여먹어 보자. 노래를 부르던 엄마에게 제발 걱정은 사서 하지 말하고 말했다.
“그것도 싫으면 집에서도 수면양말을 신어라”
라는 지키지 않아도 티 안 날 엄마의 명령이 떨어졌다. 속으로 무슨 한 여름에 집에서 수면양말이란 말인가라고 외쳤지만, 잔소리를 피하기 위한 ‘충성’을 크게 외쳤다.(보약도, 잉어도, 수면양말이 없어도 임신은 한방에 됐다. 수족냉증과 임신의 관계는 그다지 크게 없는 걸로 결론 내려본다.)
아이를 낳고, 엄마의 ‘수면양말’ 타령 2절은 계속됐다.
“아를 낳고 나면, 몸을 항시 따뜻하게 해야 된다. 덥다도 에어컨 앞에 있지 말고, 찬 바람을 증면으로 쐬지 말고! 수면양말을 절대로 벗으면 안 된다”
5월의 끝자락에 출산을 하고, 곧 다가올 더위를 대하던 딸의 모습이 눈에 선하셨는지, 타령인지 랩인지 모를 잔소리가 끝없이 플레이되었다.
그렇게 어느 날. 종류별로 보내온 미역국 옆과 반찬 옆에 비닐봉지로 수면양말 타령 3절을 시작하셨다. 검은 봉지 안에는 네 켤레의 수면양말이 있었다. 거기다 혈액순환에 방해가 되지 않게 발목의 고무줄이 툭툭 끊긴 우스꽝스러운 자태로 말이다.
하루 종일 양말 안에 갇혀있던 발을 집에서라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의식처럼 양말을, 스타킹을 빨래통에 짚어 던지고, 차가운 물을 발에게 뿌리고 얼굴에 바르다 남은 크림을 쓱싹이던 시절이 있었다.
발이 시리다고 느껴져도, 양말을 신어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에서 양말을 신는다는 건, 잘 때 수면양말을 신는다는 건, 덥고 답답한 일이라고 여겼다.
나를 옥죄였던 하루하루가 지긋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힘든 존재고, 앞으로의 걱정거리로 미칠 듯이 등골이 시리던 시절이 있었다. 왜 추운 건지 알고 싶지도 알 수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저 애꿎은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고, 전기난로를 조금 더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나는 그렇게
더위와 온기의 차이를,
답답함과 포근함의 차이를 잘 모르던 때가 있었다.
고생한 발이, 춥다고 손 내민 발을,
어쩌면 나를, 안아주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간을 지나, 발목이 툭툭 끊어진 수면양말을 사계절 내내 신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새삼 세월이 안겨준 달라진 내 모습에 웃음이 난다.
오늘도 수면양말을 타고 전해오는 온기와 포근함에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다’고 몇 번이고 나를 토닥인다. 부족한 모습도, 실패한 모습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꽤나 괜찮은 위로를 건넬 수 있음을, 힐끗, 저 발끝을 쳐다보며 감사를 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