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에게 비는 그리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2박 3일의 짧은 교토여행을 계획했던 나와 친구들은 이틀의 비소식에 출발 전부터 걱정을 한가득 챙겨갔다. 걷는 일정 속에 짐과 함께 우산까지 들어야 하고, 신발이 젖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들. 그러면서도 천년의 도읍지 교토라면 비에 젖은 모습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작은 기대도 품었다.
교토에서의 첫 날은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흐린 하늘과 물기를 가득 품은 공기는 습하고도 차분했다. 그리고 둘째 날 아침, 비는 하염없이 쏟아졌다. 숙소의 중정으로 떨어지는 비를 보며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떠올렸다.
"비 오는 날에는 비가 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우리는 이 교토의 비를 거스르지 않고, 비와 함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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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투명한 우산을 들고 숙소를 나섰다. 현대식 건물 사이로 보이는 오래된 목조 가옥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리듬감 있게 들려왔다. 비를 머금은 나무는 더 우직해 보였고, 돌길은 젖어 더욱 반짝였다. 빗속에 젖은 나뭇잎은 평소보다 더 선명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교토는 그렇게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철학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은각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교토 대학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사색하며 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좁은 수로를 따라 이어진 길은 비에 젖어 더욱 고즈넉했다. 비 내리는 소리와 걷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도 거의 없어 우리는 철학자의 길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철학자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 오는 날에도 그는 이 길을 걸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도 아마도 하루키의 말처럼 그저 비를 느끼며 걸었으리라. 우산을 통해 보이는 하늘,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젖은 땅의 냄새, 발끝에 느껴지는 촉촉함. 그저 지금 이 순간, 비 오는 교토의 철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문득 비 오는 교토가 한 편의 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율이 있고, 여백이 있고, 함축이 있고, 울림이 있는 시. 맑은 날의 교토가 화려한 산문이라면, 비 오는 교토는 간결하고도 깊은 시였다.
오후가 되어 비의 물줄기가 약해졌다. 오히려 비가 내리는 풍경을 더 만날 수 없어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거리의 등불이 빗물에 반사되어 만들어내는 황금빛 물결, 기와지붕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돌계단을 따라 흐르는 작은 폭포들.
가끔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고 한다. 비로 인해 원래 가고자 했던 몇 장소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 대신 비 오는 교토만이 선사하는 특별한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교토의 마지막 날, 체크아웃을 하고 나오는데 한번도 보지 못했던 맑은 하늘을 맞이했다. 비가 개인 하늘은 눈이 부실만큼 파랬다. 만약 처음부터 날씨가 좋았다면 더 많은 곳을 방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 오는 교토의 시적인 아름다움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15년 가까이 함께한 친구들과 비 오는 교토에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다.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고, 그 어떤 모습이어도 좋을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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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비가 내리면, 나는 교토의 좁은 골목길을 떠올릴 것이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대나무잎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물을, 그리고 무라카미의 말을.
비는 불편함이 아니라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비는 방해물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선물하는 존재였다.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비 오는 날에는 비가 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무라카미의 이 말은 이제 내게 교토를 떠올리게 하는 주문이 되었다. 비가 내리면, 나는 교토의 골목길을 떠올리고, 그저 받아들이는 지혜를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