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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는 문학의 힘이다

by 율리

우리는 가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규정한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처럼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다. 그러나 살아보니 알겠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이러니는 문학의 힘이다."
러시아 문학의 권위자인 석영중 교수님의 톨스토이 문학 강연의 내용 중에, 이 말이 너무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한 때는 이 아이러니는 내게 참 불편한 존재였다. 심플하게, 깔끔하게. 세상이 명확한 기준과 원칙으로 돌아가길 바랐고, 그런 기준에 따라 단순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때로는 '그냥 막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또 다른 순간에는 '치열한 나만의 기준을 지니고 살아야 진짜 인생이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를 들어가며, 이러한 질문들에 단순한 답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삶은 결코 심플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로 가득했다.


다양한 소설들을 읽고, 또 읽으며,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였을까. 그리고 20대에 읽었던 톨스토이를 넘어, 다시금 그의 작품을 읽으며 이런 아이러니들이 점점 친숙하게 다가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지만, 그 사랑 안에는 미움과 질투, 그리고 파멸의 씨앗이 이미 숨어 있었다. 열정적인 사랑이 결국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아이러니가 그녀의 삶에 있었다. 그녀가 자유를 찾으려 했던 모든 시도가 오히려 더 큰 속박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선택이 종종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냉혹한 진실을 보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또 다른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반은 평생 사회적 성공과 체면을 쫓으며 살았지만,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실은 가장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고, 그가 무시했던 것들이 정작 가장 중요했다는 것을 죽음의 문턱에서야 알게 된다. 죽음을 통해 삶을 발견하는 아이러니. 이반은 물리적으로는 죽어가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한다.


톨스토이의 또 다른 작품인『주인과 하인』에서는 주인 바실리와 하인 니키타의 관계가 폭설 속에서 역전되는 모습을 그린다. 권력과 부를 가진 주인이 하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는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지배하던 자가 희생함으로써 진정한 위대함을 얻는 이런 고귀한 아이러니라니.


석영중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다시 톨스토이 여러 작품을 읽어내려가며 비로소 삶의 아이러니들을 조금은 친숙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랑 안에 미움이 있고, 죽음 안에 삶이 있으며, 강함 속에 약함이 있고, 약함 속에 강함이 있다. 모순된 정의들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그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 톨스토이의, 나아가 수많은 문학의 힘이다.


아이러니는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본질이다. 문학은 이 아이러니를 비춰주는 거울이며, 우리는 그 거울을 통해 삶의 복잡성과 모순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단순히 세상을 바라보는, 어쩌면 이기적일지도 모르는 마음에서 벗어나, 이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특히나 톨스토이의 작품을 통해 이 모든 것이 더 뜨겁게 다가왔던 것은, 모순된 삶의 끝에 결국 인간이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로 남기 위해 도덕적 기준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 기준이 단순하고 경직된 것이 아니라, 삶의 복잡성과 아이러니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고 깊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은 우리에게 삶의 아이러니를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게 한다. 이것이 석영중 교수님이 말하신 '아이러니는 문학의 힘이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우리는 문학을 통해 삶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도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그리고 이 지혜야말로 우리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소중한 나침반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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