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에서 시작하는 일은 드물었다. 15년 넘게 일하고 있는 나의 브랜딩과 마케팅의 세계는 '잘된 예'를 찾는 것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공한 캠페인을 참고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에 멋진 선례를 끼워 넣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나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실패를 기다려주지 않는 회사, 타인의 인정으로 설계되는 프로젝트, 그리고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나. 나는 '레퍼런스의 중독'에 깊이 빠져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회사는 실패를 기다려주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이건 성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야'를 보여줘야 했고, 돈을 주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좋은 선례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 역시 실패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나의 경력이 되고 KPI에 들어가는 만큼 인정받고 잘해내고 싶었다. 레퍼런스는 그런 나에게 안전망이었다. 위험을 줄여주고, 성공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믿는 구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안전망이 내 사고를 점점 좁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안전한 방법에만 기대는 순간, 새로운 시도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것은 곧 자기 신뢰를 약하게 만든다. 자신을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게 된다."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철학자의 질문》중에서
레퍼런스 중독은 단순히 ‘좋은 예시’를 찾는 습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인정’이라는,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성공을 향한 집착이었다. 여기서 ‘성공’과 ‘실패’는 애초에 모호하다. 누구의 잣대인지, 어떤 맥락에서인지, 언제까지 유효한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고 나 역시 그 단어를 절대적인 기준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중독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며 어느 순간 너무 깊게 박혀버린 레퍼런스 중독, 노하우 중독.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향하고 있는 목표인 '타인의 인정'과 성공에 대한 강박이다. 이는 비단 회사를 다니면서 생긴 것이 아닐 것이다. 수우미양가, 올백, 우열반, 올에이 등 어느 순간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평가, 숫자, 줄세우기에서 파생된 이 말들로 평가받던 우리의 학창시절이 있다. 그리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 나라를 급하게 성장시키며 가장 쉽고 빠른 방법, 효율성, 성공을 일궈야 했던 부모 세대. 그들의 생존 방식은 '검증된 길' '빠른 성과'를 최우선으로 두었고, 그 가치관은 우리 세대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다. "공부 잘하는 애들 따라다녀라",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방식을 배워라". 그 시대에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방식으로 우리나라는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고, 나 역시 그 시스템 안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남과 다른 것을 경계하며, 오로지 증명된 길만을 걷기를 강요하는 곳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제 우리는 그 시스템의 부작용을 목격하고 있다. 모두가 같은 성공 사례를 보고, 같은 트렌드를 따라하며 만들어진 뻔한 결과물들. 개성과 창의성이 사라진 획일화된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검증된 레퍼런스에 의존했지만, 정작 진짜 성공인 '나다움'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어, 이 풍토가 다음 세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말한다. 좋은 성적을 갈망하고, 사회에 잘 어울렸음 하고, 튀지 말았음 하고, 제일 앞에 섰음 하는.. 우리가 답습한 것들. 실패를 견디는 법보다 피하는 법을 먼저 가르친다. 수업 시간에 엉뚱한 대답을 한 아이가 웃음거리가 되는 순간, 그 아이는 다음부터 안전한 답만 고르게 된다. 시험지의 오답보다 교실의 웃음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실패 없는 성장이 없다는 걸 잘 안다. 타인의 시선과 비교를 절대 기준으로 삼는 사회에서, 창의성은 금세 시들고 자기 확신은 무너짐을 안다. 하지만 나 역시 SNS, 미디어를 통해서는 더욱 완벽하고 성공한 삶의 모습들만을 접하며, 남과의 비교 속에서 약한 자존감을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본다. 우리가 레퍼런스에 중독되어 살았던 것처럼, 아이들은 더욱 정교한 타인의 시선에 가두는 것은 아닐까? 매일을 반성하고, 새롭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물론 레퍼런스를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발전해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레퍼런스가 출발점이 되느냐, 도착점이 되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레퍼런스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타인의 시선보다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런 용기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지혜. 레퍼런스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깨닫고 해결해나갈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나에게, 또 누군가에게 몇 자를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