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만난 사람의 총합이다.'

by 율리

'나는 내가 만난 사람의 총합이다.'

은유 작가님의 『아무튼 인터뷰』표지에 적힌 이 문장을 마주했다. 묘한 전율이 느껴진다. 아니 무서운 전율이라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 무서움은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 닮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나는, 내가 살아오며 만난 모든 사람들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결과라는 깨달음. 그것은 마치 내 존재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흝을 털어내는 기분이랄까.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나는 내 부모의 말투를 닮았고, 친구의 습관을 따라했으며, 연인의 취향에 물들었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 부모가 던진 무심한 한마디가 지금도 내 안에서 메아리치고, 학창시절 친구들과 나눈 농담이 여전히 내 유머감각을 좌우한다. 첫사랑이 좋아했던 음악이 아직도 내 플레이리스트에 남아있고, 직장 선배의 일처리 방식이 지금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런 깨달음은 때로 무력감을 안겨준다. 과연 순수하게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내 생각, 내 가치관, 내 성격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온 것은 아닐까? 환경의 힘은 정말로 무섭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주변 사람들의 영향 아래에서 그들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부모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자녀에게 전수한다. 자녀는 그것을 흡수하며 커간다. 때로는 반발하기도 하지만, 그 반발조차 부모의 영향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친구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친구의 말투를 따라하고, 그들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의 가치관에 동조하게 된다. 부부 사이에서는 더욱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함께 살아가며 서로의 삶의 패턴에 스며들고, 서로의 말투를 닮아가고, 심지어 얼굴마저 닮아가며 운명공동체가 되어간다.


이 모든 관계들, 환경들이 나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때로는 무겁게 느껴진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받으면 그 상처가 나의 일부가 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으면 그 사랑 역시 나의 일부가 된다. 부지런한 사람들을 만나면 덩달아 부지런해지고, 부정적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 나도 모르게 부정적으로 변해간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갈수록 실감이 난다.


환경에 대한 무거운 생각과 동시에, 희망적인 생각도 든다. 우리가 물리적 환경을 바꿀 수 없을 때가 있다. 어떻게 매번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환경에 놓일 수 있겠는가. 그런 우리가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방법, 바로 '책'이라는 놀라운 도구가 있다. 책은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의 장소다. 나는 책을 통해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철학자와 대화하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누군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책은 가장 민주적인 환경이다.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책장을 넘기면 인류 최고의 스승들을 만날 수 있다. 괴테의 감성을 느끼고,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멀리 나가지 않아도 바꾸고 싶은 환경과 정반대인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지금 내 주변에 대한 불만,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내 환경에 대한 원망이 자라나는 순간이 온다. 나 역시 요즘 그렇다. 그러한 자괴감에 잠식 될 것 같으면 책을 펼친다. 이건 더 깊은 심연으로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물론 유튜브에서 그런 영상을 찾아 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책을 따라갈 수 없다.




결국 '나는 내가 만난 사람의 총합'이라는 문장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희망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느냐, 어떤 책들을 읽느냐에 따라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환경의 힘이 무섭다면, 그 환경을 내가 선택할 수 있을 때 더욱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물리적 환경을 바꿀 수 없을 때는 정신적 환경인 책을 통해 나를 키워갈 수 있다.


권태가 오고, 자괴감에 느낄 때면 책장 앞에 선다. 도서관을 간다. 서점을 찾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는다. 어떤 사람을 만날까? 어떤 세계로 떠날까? 어떤 생각들이 나를 변화시킬까? 무서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한 권의 책을 펼친다. 내가 만날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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