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인생을 살아오며 나는 자주 이 말을 믿었다. 적어도 그 말은 나에게 꽤 효과적인 주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 원치 않는 상황, 억울한 순간들까지도 결국 지나가는 것들이었고,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뒤는 나름 괜찮은 결말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피할 수 없어도 즐길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직면하기 전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걱정'이라는 녀석.
걱정을 시작하면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최악을 떠올리며 미리 모든 걸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는 사람과, 걱정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전자다. 미리 모든 걸 생각한다. 거기다가 해결책을 찾기에 앞서 최악부터 상상한다. 최악이 어디까지인지 규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늘 "그 최악의 악"까지도 생각해본다. 그 끝에는 늘 상상이상의 끔찍한 장면들이 있다.
그러다보면 '설마 이렇게까지 될까?' 라는 질문이 든다. 이 질문은 신기하게도 언젠가부터 나를 안정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마치 스스로를 겁줘서 안심하는 사람처럼. 정말 끔찍한 결말을 머릿속에 미리 상영해 두면, 현실은 그보다는 낫다는 위안이 남는다. "최악을 생각했으니 이제 덜 아프겠지" 같은.
하지만 사실 그건 일종의 '고도의 훈련된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최악의 상상을 끝내고 나면 나는 곧 회피를 시작한다. 갈등도 없고, 웃음이 많은 예능을 고른다. 누군가의 웃음이 내 머릿 속을 잠식하고 마비시키게 돈다. 걱정을 몰아내기 보다는 아주 가벼워보이지만 강력한 것으롤 덮어두는 것이다. 결국 걱정을 하지 않는게 아니라, 걱정을 전략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피는 오래가지 못한다. 타인의 웃음소리가 끝나는 순간, 사방은 조용해지고, 허무가 밀려온다. 웃었는데 남는 게 없다. 걱정은 결국 다시 기다렸다는 듯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걱정은 연기처럼, 틈만 있으면 들어온다. 문을 닫아도 새어 들어오고, 잠깐 창을 열면 벌써 가득 찬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깨닫는다. 회피는 도망이 아니라 '유예'일 뿐이었구나.
이 회피가 아닌, 유예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이제 미리 하는 '걱정'이 아닌,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 자연스럽게 맞이하게 된다. 또 감사하게도 나의 '일상'또한 회피와 유예의 다른 방식으로 자꾸 나를 이끌어준다. 비로소 걱정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생각한다. '될 대로 되라' '자 이제 어쩔까' '그냥 지금의 내 느낌을 믿자' '깊게 생각하지 말자'이 그럴듯한 체념들은 낙담이 아니다. 결국에는 이럴 수 밖에 없었다는 내 나름의 해결방안일지 모르겠다.
사실 요즘 걱정이 많다. 계속 미뤄둔 걱정과 직면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그 걱정들에게서 필사적으로 피하는 중이다. 걱정이 많이 없는 축복받은 성격을 가진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그 축복을 받지 못했다. 분명히. 나는 도무지 걱정 없는 사람으로 살 수가 없음을 인정한다. 대신 나는 회피의 회피를 더해, 걱정과 나 사이에 작은 간격은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세네카는 "우리는 일어날 일보다 일어날 거라고 상상하는 일 때문에 더 많이 고통받는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걱정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것이다. 나는 안다. 사실 일어난 일보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더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도무지 사라질 생각이 없는 걱정 앞에 나는 작은 결심을 한다. 피할 수 없으니 너를 요리조리 피해다녀 보겠다고. 그렇지 못한 나를 앞세워 원망하느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내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걱정과의 원만한 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