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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an 28. 2024

불렛저널을 시작하며

 2024년, 불렛저널을 시작했다. 거창한 이 이름은 디자이너 라이더 캐롤이 고안한 방법으로 우리가 쓰는 다이어리를 쓰는 방법 중 하나이다. 조금 더 편하게 말하면, 우리가 흔히 사는 다이어리가 먼슬리, 위클리, TO-DO LIST 등으로 기존 인쇄가 되어 있다면, 이건 그저 백지 혹은 기본 도트나 그리드 노트에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 넣는 방식이다. 

불렛저널의 대표적인 형식. 빈 종이에 도트만 가득하다


 겁 없이 불렛저널을 시작한 이유는 정형화된 다이어리를 쓰며 불편했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이어리를 참 긴 시간 써왔다. 대부분 먼슬리 달력을 기준으로, 위클리로 이어지는 달력들을 써왔는데 대부분이 업무와 관련된 것들로 채워진 것들이었다. 퇴사 후에는 자유로워진 시간을 현명하게 쓰고 싶어서 시간대별로 계획할 수 있는 다이어리를 골랐는데, 나와는 맞지 않았다. 물론, 주어진 템플릿대로 잘 활용하고 그 다이어리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게는 뭔가 시간의 족쇄 같았고, 작게 쪼개어진 시간에 매몰되어 큰 그림을 놓치는 기분이 들었달까. 그리고 이리저리 색깔을 칠하고, 스티커를 붙여대고, 그림을 그려가는 감성에는 그 템플릿들이 사무적으로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부터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을 오리고, 붙이며 꾸몄던 다이어리 습관을 보면 나는 그게 잘 맞는 사람이었는데, 다양한 다이어리들의 모양들에 현혹되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통해 '불렛저널'을 꾸준히 하시는 분의 피드를 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글씨가 예쁜 사람의 다이어리 꾸미기(요즘엔 이걸 다꾸라고 부르더라)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불렛저널을 구성하는 섹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하다 정말, '아! 이거다! 내가 찾던 다이어리가 이제야 나타났다!' 싶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미 2024년이 지났고, 나는 올해도 열심히 커피를 사 먹고 다이어리를 장만했다. 근사한 다이어리였지만, 선뜻 또 시간대별로 쪼개어진 나의 하루를 이 다이어리에 기록할 생각을 하니, 선뜻 펜을 들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문구점을 기웃거리며 모아 온 스티커들과 색깔펜들이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해의 시간이 왠지 모를 찝찝함으로 지나가고 있던 찰나, 나는 과감히 커피와 맞바꾼 다이어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불렛저널을 시작했다. 


 겁 없이 3만 원이 넘는 비싼 불렛저널을 샀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다이어리에는 정보의 중요성이나 종류를 표시할 때 쓰는 기호라 불리는 Bullet이 앞장에 있었고, 아주 작은 글씨로 Index, Monthly log, Future log 등 적혀있는 페이지들로 시작되었다. 그냥 단순히 손으로 쓰는 것만 좋아하고, 나만의 템플릿으로 무언가를 꾸미고 싶다는 반항적인 소녀 같은 감성으로 시작하기엔 빈 노트가 주는 중압감 컸다. 그러다, 불렛저널을 쓴 사람들의 인스타그램, 블로그, 유튜브 등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다, '불렛저널' 창시자인 라이더 캐럴이 쓴 <불렛저널>이라는 책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샀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책으로 시작해야 마음이 안정되는 그런 버릇이 있다.)

읽을수록 '불렛저널을 선택한 게 정말 잘한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손으로 쓰고, 그리는 행위에서 받는 왠지 모를 위안감의 정체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그리고 바꾸고 싶어도, 너무 선명하게 그어진 줄을 수정테이프로도 지울 수 없었던 그런 답답함들이 세상에 투영되었던 이유도, 그간 내 하루가 갑갑했던 이유도 지금까지 내 기록에 문제가 있었기에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렛저널의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말을 적었다. 그리고 2024년에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 그에 맞는 방법들을 만다라트 차트를 하나하나 자로 줄을 그었다. 또 읽고 싶던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Book Wish List, 읽은 책들을 정리하기 위한 Reading Log, My best book, Expense Tracker 등을 직접 손으로 그리고 꾸미며 한 해동안 써 내려갈 설렘을 맛보았다. 

또 매일매일을 어떻게 적으면 좋을지, 오늘은 이렇게도, 다음 날은 이렇게도 해보며, 가장 잘 맞는 나만의 템플릿을 찾아가고 있는 중인데, 그 시행착오의 과정이 다이어리에 담기는 것이 무엇보다 좋다. 



 불렛저널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2주 정도가 되었다. 페이지가 200페이지가 넘을 만큼 다이어리의 두께가 꽤나 크지만 요즘 이 무거운 불렛저널을 정말 분신처럼 들고 다닌다. 거기다가 핑크색 커버가 더러워질까 귀여운 스누피 북파우치도 하나 마련해 고이 모셔두고 다니는 중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 노트를 들여다보며, 선명하고 주체적인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매일 밤, 그 옛날 다이어리를 꾸미던 소녀감성을 담아 스티커를 붙이고, 묵혀둔 귀여운 자로 줄을 긋고, 형광색을 칠해가며 느릿느릿 많은 시간을 담아가고 있다. 이 시간만큼은 세상의 소음에서 달아나고, 또 세상의 규정에서 벗어나 나만의 지혜로움을 쌓는 기분이다. 


문득 나는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 내가 서 있는 하늘의 색은 무엇인지 궁금해하던 적이 있었다. 앞으로 써 내려갈 이 노트가 그 해답을 주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또 과감하게 기대를 던져본다. 


불렛저널의 힘은 인생에서 어떤 계절을 지나는지 상관없이,
우리 필요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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