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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an 14. 2024

가족 그리고 나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사람 사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막연히 혼자 사는 삶이 부럽기도 하다. 때로는 처량해 보이기도 당차보이 기도 하는 '나 혼자 산다'라는 외침, 프로그램이름도 애처롭기도 부럽기도 하다.

 축구선수 조규성이 나오는 회차를 보았다. 그는 덴마크 리그 진출과 함께 타국에서 가족들도 없이 '혼자' 살고 있었다. 먼 나라 속에서 그는 잘 적응하는 모습이 보였고, 그중에서도 현지 코치 가족들과 친해져 스스럼없이 지내는 장면이 나왔다. 코치는 물론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자녀와 함께 한참 눈싸움을 하고, 그들의 집에서 보드게임을 하는 모습이 담겼다.

타지에서 '혼자'의 삶 속에서 그는 그들의 통해 '가족'과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안정된 정착을 이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철저하게 혼자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족의 유대감을 찾은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mbc <나 혼자 산다> 조규성 편 중에서

 

    지난 주말, 친정식구들과 3박 4일 여행을 다녀왔다. 부모님과 우리 집 세 식구, 오빠네 네 식구가 모였다. 초등학교 1, 2 학년 두 명, 세 살 1명 총 3명의 딸들이 함께 한다. 워낙 셋 다 텐션이 높다 보니 어딜 가도 정신이 없다. 하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많은 딸아이들을 케어하는 게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거기다 어쩌다 보니 여행을 계획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내가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실 2박 3일 동안 여덟 명과 함께 하는 여정이 북적북적 정신없이 흘러간다.

 낮에는 아이들을 쫓아다니고, 밤에는 떠들어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른들의 이야기 꽃이 펴진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가장 잘 맞는 술친구인 사위를 만난 아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두 톤 정도가 높아졌다. 어른들의 말에 리액션을 잘하는 남편의 맞장구도 텐션이 높다. 술 좀 그만 마시라는 엄마의 잔소리도 더욱 찰지다. 오랜만에 만난 친정오빠 내외와 아이들의 교육 이야기가 한창이다. 이야기 꽃 사이에서 아이들의 소리는 더욱 높아진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불현듯 노래도 부르는 귀여운 존재들. 귀여운 악동이라는 말이 딱이다. 이런 풍경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래, 이런 게 행복이지 싶다. 그러다가 문득 혼자만의 시간이 미친 듯이 그리워진다.  방 두 개짜리 펜션에는 혼자일 수 있는 사각지대가 없다. 방은 이미 가득 찼고, 거실에는 코 고는 아빠와 남편이 잠들었다. 순간 불 꺼진 집에 들어오면 고독감을 느낀다는 <나 혼자 산다>의 그들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아니, 일 년에 몇 번 밖에 없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걸까. 죄스럽기도 하다. 그런데도 밀려오는 '혼자'이고 싶은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비단 가족들과의 여행에서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세 식구가 있는 집에서도 나는 혼자이고 싶다는 감정을 여러 번 느낀다. 특히 긴 겨울방학에 시작된 요즘은 더더욱 그렇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의 질문 폭격이 성장의 증거나 기특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질문 좀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남편과 투탁거리는 시간들이 서로를 이해해 가는 성장통이라 느끼면서도, 피곤한 감정들은 언제 끝나는 거냐고 물을 때가 많다. 크나큰 배낭을 멘 것처럼 무겁다고 느낀다. 가족과의 유대감이 반가우면서도 혼자만의 정적을 갈구한다. 가끔 다 짚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안고 사는 엄마이자, 아내인 내 삶이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중에서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중에서


 가족의 유대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나와 혼자의 고독을 미친 듯이 갈구하는 내가 있다. 그 어떤 나도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는 없다. 가족을 향하기에 무조건적으로 아름답거나, 그 속에서 고독을 갈망하는 것이 이중적이거나 나쁘지도 않다.

 

 그걸 몰랐던 시절에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다. 이런 나의 이중성에 몸서리쳐지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인정하는 순간 편해졌다. 가족이 먼저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혼자만을 위한 것들을 행한다. 예뻐 보이는데 꽤 비싼 빈티지잔이 보이면 하나만 산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혼자 일어나 우리 집에서 하나뿐인 잔에 커피를 탄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 혼자 사는 것처럼 고독을 즐긴다.


 그렇게 혼자의 시간이 애처로워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하면 남편과 아이를 깨운다. 가족의 행복이 필요하면 오롯이 그 유대 속으로 뛰어든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울 것도, 비열할 것도 없이 그 자체의 감정을 나름대로 풀어가고 있다. 가끔 이기적이고, 희생의 피해의식 같은 소용돌이가 심할 때도 있지만 이제 그 감정을 인정하고 즐기고 있다. 아직 부족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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