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황석영이 AI를 ‘조수’로 활용해 집필한 소설 『할매』를 보며, 나는 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꺼내 들게 되었다.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호흡을 맞추는 그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기술을 거부하지 않되, 기술에 잠식되지 않는 태도. 그 균형감각에 정말 깊은 존경을 보낸다.
AI와 공존하는 시대, 특히 ‘창작의 영역’은 언제나 논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AI는 작가의 비서일 뿐, 창작의 주체는 여전히 인간의 고뇌와 경험이다.”
황석영 작가님의 이 말은 단순한 입장 표명이 아니라, 창작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처럼 들렸다.
나 역시 언젠가 이런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작가라는 직업은 AI 시대에도 과연 유효할까?’
기술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문장은 점점 더 그럴듯해지는 이 시대에, 인간의 언어는 어디까지 필요할까라는 질문들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인간의 깊이는 언제나 끝을 알 수 없었다.
차마 다 품어낼 수 없는 감정의 면적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는 마음의 미세한 결들. 이 복잡한 층위를 읽어내고, 언어로 길어 올리는 일은 과연 누구의 몫일까.
기술은 문장을 나열할 수는 있어도, 그 문장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시선은 언제나 경험에서 비롯되고, 경험은 오직 인간의 삶을 통해서만 축적된다.
그래서 나는 ‘작가라는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 그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추측. 나는 책을 읽을수록, 특히 고전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확신이 든다. 이 영역은 결코 AI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치밀하고, 뜨겁고, 때로는 잔인할 만큼 경멸적이며,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따뜻한 시선. 인간 스스로도 미처 자각하지 못한 욕망과 위선을 들춰내는 능력. 이런 시선을 찾아내고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인간, 다시 말해 작가들 뿐이라는 생각이 한다.
물론 창작의 ‘정의’를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어디까지를 창작이라 부를 수 있는지, 어디서부터는 도구의 영역인지에 대한 질문은 쉽게 결론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논쟁이 치열해질수록 우리의 눈은 더 높아질 것이다. 더 이상 그럴듯한 문장만으로는 감동할 수 없는 시대. 대신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려는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날 설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짜 옥석은 더욱 또렷해진다. 모두가 비슷한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시대일수록, 결코 평준화될 수 없는 작가들의 위치는 오히려 더 귀해진다. 인간의 깊이를 끝까지 파고드는 작가, 세계를 자기만의 시선으로 재구성하는 작가는 더 사랑받고, 더 오래 남을 것이다. AI 시대는 작가라는 직업을 위협하는 시대가 아니라, 어쩌면 상향평준화를 강제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쉽게 쓰는 사람은 더 빨리 잊히고, 끝까지 자기 언어를 붙드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시대.
생각해보면, 이는 비단 작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다른 직업의 영역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창작의 영역에서만큼은, 인간의 고뇌와 경험이라는 원천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하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책임은 인간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을 가장 오래, 가장 집요하게 짊어져 온 존재가 바로 작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여전히, 작가라는 직업의 미래를 동경하고, 믿고, 기대한다.